400년 전 바다 이야기(4/6)
통제사도 혹독한 고문에 하늘을 가리고 땅을 덮던 총기를 잃었음에 틀림없는 것 같았습니다.

최성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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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즈믄해라 불린 거북의 한(4)
  
   즈믄해는 거기서 몇 날 며칠을 아무 것도 안 먹고 다 부스러진 거북선을 보고 망연히 있었습니다. 몇 날 며칠이 아니라, 무려 한 달 보름을 거기 그렇게 꼼짝 않고 있었습니다.
  
   힘이 하나도 없는 상태서 둥둥 바다 위로 아무 생각 없이 올라왔더니, 왜병의 소리가 막 들렸습니다. 이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순신이란 말을 자꾸 하면서 두려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즉시 용기를 내어 닥치는 대로 물고기를 잡아먹은 다음, 한산도로 한산도로 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분은 없었습니다. 그마저 왜적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고금도 근처에서 그분을 만났을 때 보니까, 통제사는 폭삭 늙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맞았는지 잘 걷지도 못했습니다. 전함도 겨우 12척밖에 없었습니다. 칠천량해전에서 몰래 도망친 전함이라고 했습니다.
  
   용맹한 수군은 장군이든 병졸이든 다 죽고 동네의 껄렁껄렁한 청년이나 주정뱅이짓하던 반늙다리뿐이었습니다. 그나마 먹을 게 없어서 모두들 하루에 두 끼도 간신히 먹었습니다.
  
   통제사가 정말 불쌍해 보였습니다. 즈믄해는 질 게 뻔한 전쟁, 그만 자기를 따라서 저 망망대해를 지나 그림 같은 섬으로 가자고 떼를 썼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통제사로부터 한자를 한 100여자 배워서 서로 의사를 전하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통제사는 즈믄해의 등에 두 글자를 썼습니다.
   '여지(女之).'
   '너 혼자 가라.'는 말이었습니다.
   즈믄해가 글자를 가리켰습니다.
   '여부지 아부지(女不之 我不之).'
   '당신이 안 가면 나도 안 간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갑자기 장난기가 동했습니다. 그래서 즈믄해가 글자를 가리켰습니다.
   '여지녀(女知女)?'
   '당신 여자를 알아요?'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랬더니 빙긋이 웃으시면서 즉시 즈믄해의 등에 이렇게 썼습니다.
   '아지녀(我知女).'
   '난 여자를 안다.'는 뜻도 되고 '난 널 안다, 너는 결국 여기 나와 함께 있을 거라고 믿는다.'는 뜻도 담긴 말이었습니다. 이 한 마디 농담으로 모든 수심이 다 달아났습니다. 팽팽하던 긴장이 싹 풀리면서 엔돌핀이 마구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즈믄해와 통제사는 용기백배하여 다가올 건곤일척의 전쟁에 대비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할 기적의 전쟁에 대비했습니다. 즈믄해는 험한 물살을 헤치고 울돌목 바닷속의 지형, 지물, 물결, 조금, 사리에 대해 확실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이미 대부분 알고 계셨지만, 바닷속은 역시 즈믄해보다 잘 알 리 없었습니다.
  
   칠천량해전에서 날랜 군사가 다 죽는 바람에 피난민을 이리저리 긁어 모은 오합지졸밖에 없어서, 비록 통제사의 엄한 훈련과 자상한 보살핌으로 제법 깃발에 따라 들고 나고, 북에 따라 가고 오고, 불화살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등 수군 모습을 갖췄지만,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적의 요란스럽기 짝이 없는 전선(戰船)을 보자, 바다를 가득 메운 엄청난 수의 군함을 보자, 안 그래도 빠른 적의 전선들이 해류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을 보자, 간이 콩알만해져서 모두 통제사 뒤에 멀찍이 떨어졌습니다.
  
   대소 3백여 척이 바다를 가득 메운 채, 휘황찬란한 색깔에 무시무시한 그림을 그려 붙이고 기세등등하게 13척 아군을 향해 밀려오는 장면은 말 천 마리가 수레 백 대를 끌고 강아지 한 마리를 깔아 뭉개려 오는 듯했습니다.
  
   멀리 어부들이 백여 척의 포작선(어선)을 타고 마치 군대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여 아군을 위로했지만, 만약 적이 밀려오면 그들은 여지없이 고기밥이 되고 이 쪽 수군은 그들 때문에 도망도 못 가게 되었습니다. 아까는 몰랐는데, 그것이 적을 위협할 줄 알고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겁 없이 결전에 임했는데, 이제 보니 사실 그건 보통 사람이 보아도 참 어리석기 짝이 없는 전술이었습니다.
  
   통제사도 너무도 혹독한 고문에 하늘을 가리고 땅을 덮던 예전의 총기를 잃었음에 틀림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신출귀몰한 통제사가 곁에 있다고 해도 적이 코앞에 다가오자 모두들 오금이 저려서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계속--
  
[ 2006-09-01, 21:2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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