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의 편지'
오늘은 실로 뜻밖의 일 하나를 전해 올리겠습니다.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십삼년 만에 전달되어 온 엽서. 밤중에 부산에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조선일보' 영남특파원 김홍수 사회부 기자라 하는 사람이 김중업 건축가를 아십니까, 하는 급한 목소리의 전화였습니다.
김중업 씨가 사십삼년 전, 그러니까 1952년 프랑스 파리에서 보낸 나에게로 오는 엽서가 지금 '부산일보'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몇 마디 전화인터뷰가 있었습니다. 나는 물어보는 대로 대답을 했습니다.
한국 6·25 동란시 부산으로 피란을 가서 송도에 자리잡고, 김중업씨의 청을 들어서 송도 보리밭을 사서 삼면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집을 지었다는 것, 그것이 김중업씨의 첫번째 작품이라는 것, 그 후 김중업씨는 큰 뜻을 가지고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다는 것, 그 곳에서 이 엽서를 보냈다는 소식 등.
그랬습니다. 김중업씨하곤 6,25동란 전 서울 명동거리에서 만나서 친했던 겁니다. 그는 아주 재치있는 연배 친구로서 문학이나 음악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말하자면 꿈이 서려 있는 낭만적인 청년이었던 겁니다.
그는 그의 꿈대로 아주 낭만적인 설계로 한양대학교 건축가 교수인 그의 친구 박학재라는 사람과 같이 나의 집을 지었던 겁니다. 아주 모던한 산장처럼.
나는 이 집에서 작품을 써서 1952년 7월에 제3시집 '패각의 침실(貝殼의 寢室)'을 출판했습니다. 최영해 사장이 그의 '정음사'에서 출판을 해 주어서.
난 멋을 내느라고 'The House of Shell'라는 문패까지 이 집에 달았던 겁니다.
박종화, 모윤숙, 이헌구, 김광주, 이해랑, 한노단, 이인범, 김환기, 김중업 이런 분들을 초대하여 집들이를 했습니다. 참으로 까마득한 생각이 듭니다. 이 분들은 이미 다 죽었으니. 사십삼년 만에 전달되는 엽서, 이 신기한 사실을 편지로 하나 남깁니다. 그럼 또(1995.4.7)>
시인 조병화가 시작(詩作)의 산실(産室)로 삼았던 '패각의 침실'은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아마 추측컨데 편운(片雲, 조각구름: 조병화의 호)의 부인이자 의사인 김준 여사가 운영하던 '송도의원' 건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중업이 조병화에게 보낸 엽서는 파리시내 어느 빨간 우체통에 넣었으나 우체통 모서리에 꽃혀있어서 우체부가 제대로 수거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가 43년 만에 발견돼 부산으로 보내진 것으로 추측된다.
국제우편물을 넘겨받은 부산우체국이 신기한 엽서의 수신인을 찾지 못하자 신문사에 연락,보도하게 해서 세상에 그 사연이 알려진 것이다.김경업은 부산시 남구 대연동 자유와 평화를 지키다가 산화한 참전 16개국 용사들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UN기념묘지'의 정문과 부산대학교 본관건물을 설계하기도 했다. 편운 조병화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조병화 문학관과 편운제(片雲齊)는 시인의 고향인 경기도 안성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