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12월30일 전주(全州)를 다녀왔다. 경북 안동인(安東人)들이 안동이 정신문화의 수도(首都)임을 자부하며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부른다면 호남인(湖南人)들은 전주(全州)를 제왕(帝王)의 고향이라며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부른다. 추로지향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선비와 학문의 본향(本鄕)이라는 뜻이고 풍패지향은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라는 의미를 담은 국가의 울타리임을 내세우고 있다.

전주에는 태조 이성계와 연결되는 경기전(慶基殿)과 오목대(梧木臺)등 유적들이 많다. 특히 경기전 경내 어진박물관(御眞博物館)에는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어진이 전시되고 있다. 어진박물관을 관람하다 보면 눈에 띄는 두 줄의 사자성어(四字成語)가 눈에 들어 온다.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가 그 것이다. 이 글귀는 광주공항에도 있고 땅끝 해남에도 있다.

전라도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이 글귀는 성웅(聖雄) 이순신 장군의 문집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나온다."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이므로 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마저 잃으면 조정과 산하와 백성이 모두 왜놈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 것이란 절박한 심정에서 이런 충정을 한 줄 한시(漢詩)로 남겼을 것이란 것이 전문가들의 번역이다. 이순신 장군의 우국충정이 시공(時空)을 넘어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호남인들은 이순신 장군의 이같은 단심(丹心)을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있으며 그 고귀한 애국심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는지 '어진박물관'에서 생각해 봤다. 요즘 SNS에는 기울어지고 있는 나라를 걱정하며 뜻있는 호남 출신 인사들이 호남인들의 각성(覺醒)을 촉구하는 글들을 많이 발표하고 있다. 호남인들은 문재인 정권의 무능한 국정운영에 만족하고 있는가? 호남공화국이라는 비판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호남마저 무너지면 국가마저도 없다는 이순신 장군의 그 깊은 심정을 제대로 헤아리고 있는가? 호남인들만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강강강수월래'나 부르고 있을 것인가?

전주에서 만난 어느 택시기사는 "새만금은 문재인 정권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가 완공시켰다" 했다. 지난해 11월 목포에서 만난 택시기사는 "대통령을 배출한 도시는 모두 폭삭 망했다"고 털어 놓았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을 배출한 목포는 과거 우리나라 3대 무역항이었으나 지금은 몇번째 도시인지 존재감마저 없어졌고 현직 대통령을 비롯해 3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부산도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고 했다. 대구도 경제사정이 좋지 않다는 관광객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기도 했다.

전라도를 여행하면서 민초인 참 호남인들이 들려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언론이 나팔불어대는 여론조사나 정치인들이 떠들어대는 허황된 얘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확인했다. 깨어 있는 호남인들아. 그대들의 용기에 기대를 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