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태종 홍타이지와 중화인민공화국 시진핑 주석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달라진 점이 있는가?
2017년 12월2일, 병자호란이 일어난 지 381년이 되는 날이다. 청(淸)나라 태종 홍타이지(黃太極)는 12만 병사를 이끌고 조선을 쳐들어와 배명친청(排明親淸)을 강요했다. 오랑캐의 침공을 받은 인조 임금은 병사 1만 2000여 명을 이끌고 조정대신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있으면서 청군에 항거했다. 그러나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끝에 1637년 1월30일 삼전도에서 항복하는 굴욕과 수치를 당했다. 항복의식에서 조선의 국왕 인조가 당해야 했던 수모와 굴욕은 필설(筆舌)로 이루 형언하기 힘들 정도의 처참한 모습이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오랑캐의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명각에 달려 있는데도 조정대신들은 주화파(主和派)와 주전파(主戰派)로 나뉘어져 말싸움이나 하는 소모전으로 허송했다. 이런 광경을 지켜 본 최명길의 탄식이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지금 성(城) 안에는 말(言)먼지가 자욱하고 성 밖에는 말(馬)먼지가 자욱하니 삶의 길은 어디로 뻗어 있는 것이며 이 성이 대체 돌로 쌓은 성이옵니까? 말로 쌓은 성이옵니까?"
인조 임금이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적 항복을 하고 한강을 건너가려 할 때 백관들은 임금의 어의(御衣)자락을 붙잡고 살아남고자 했는가 하면 포로로 붙잡힌 백성들은 "우리 임금님, 우리 임금님,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吾君,吾君 ,捨我以去乎) 하며 울부짖었다는 기록이 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381년 전 당시의 이 참혹한 현상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 우리 정치권은 당시와 달라 진 것이 있는가? 조선임금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청태종이 요구한 사항은 또 어떠했는가?
*조선은 청나라의 신하국으로서 예를 지킨다.
*명나라와 국교를 끊고 명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는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대신들의 아들을 인질로 보낸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조선은 지원군을 보낸다.
*조선인 포로가 도망쳐 오면 청나라로 보낸다.
*조선은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지 않는다.
*2년 뒤부터 청나라에 조공을 보낸다 등이다.
이때 청나라에 포로가 된 백성이 약 60만 명이나 됐고 이 가운데 여성이 20만 명이나 됐다는 기록도 있다. 이들 조선의 여성들은 오랑캐들에게 시달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환향녀(還鄕女)가 되어 화냥년이란 오명과 푸대접에 한많은 일생을 보내야 하지 않았던가. 삼학사가 소현세자 앞에서 처형당하고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으로 전략하는 국치(國恥)의 역사가 바로 병자호란이다.
다시 2017년으로 돌아와 보자. 사드배치 이후 중국이 우리에게 가한 경제보복은 어떤가? 그 보복의 족쇄를 풀어주는 척하면서 문재인 정부에 요구한 이른바 삼불일한(三不一限)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드를 추가배치하지 않는다.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MD)에 가입하지 않는다.
*한·미·일 군사동맹을 체결하지 않는다.
*앞으로 사드 가동시 중국쪽 탐사활동은 제한한다 등이다.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와 중화인민공화국 시진핑 주석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달라진 점이 있는가? 병자호란 때 무능한 임금이 펼친 청야견벽(淸野堅壁)의 전략은 과연 옳은 작전이었던가? 들판을 깨끗하게 치우고 성벽을 굳건히 쌓기만 하면 적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생각은 과연 옳은 것이었던가? 독안에 든 쥐요, 우물안 개구리같은 단견(短見)이 이 나라 산하(山河)를 피로 물들게 하지 않았던가?
한족의 명나라가 기울어지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새로 등장하는 국제정세에 둔감한 채 우왕좌왕하던 당시의 조선왕조와 북핵 위협 아래 코리아 패싱이 거론되는 오늘의 대한민국은 어떻게 다른가? 이런 비상시국에 대통령과 정치권은 어떤 생각과 각오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위정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1636년 12월, 그해 겨울은 너무 슬펐어요
- 문무대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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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01, 1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