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과거 지향적인 민족이다. 과거 지향적 문화는 워낙 뿌리가 깊고 넓어서, 우리는 스스로 의식조차 못한다. 조선의 ‘아리랑’에도, 고려의 ‘가시리’에도, 한국의 ‘진달래꽃’에도 이런 정서는 깊게 배어 있다. 백제는 ‘정읍사’에서 현재를 중시하고 신라와 고구려가 각각 ‘처용가’와 ‘여수장우중문시’에서 미래를 중시했는데, 고려 중기부터 과거가 더 중시되기 시작한 듯하다. 대략 그때부터 요순(堯舜)의 신석기시대를 이상향으로 삼는 유교가 지배층에 정착되면서 가문 좋은 문신이 입지전적인 무신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공구(孔丘)는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여 주나라 무왕 희발(姬發)의 청동기시대를 이상향으로 업데이트했지만, 그것도 이미 불가역적인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따라 대세로 굳어진 당시의 철기시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한국인은 어딜 가더라도, 한국에서 가장 먼 서울의 대척점(對蹠點) 우루과이의 몬테비디오에 가더라도, 고향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외롭지 않고, 감옥에서조차 초중등 동창 셋만 만나면 유비의 도원결의보다 뜨거운 일심계(一心契)를 만들어 쓸개를 다투어 꺼내 보여 주며 플라톤의 주장에 동조하여 마누라라도 공유할 듯이 호들갑을 떤다. 지연(地緣)과 학연(學緣)은 한국인을 이해하는 첩경인데, 학연에서는 대학보다는 그 이전 고등학교나 중학교가 훨씬 중요하다. 인간의 뇌는 대개 만 20세에 성장을 멈추는데, 그 시기가 바로 고등학교다. 그래서 한국처럼 지독한 과거 지향적인 문화에서는 고등학교 동창이 대학 동창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다. 현실적 이익은 대체로 고대, 연대, 서울대 동창의 입에 달려 있지만, 속내는 광주일고, 부산고, 경북고, 경기고 동창의 귀에 털어놓는다. 아니, 이심전심이라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다. 투표는 과거를 더 거슬러가서 할아버지의 고향이 제일 중요하다. 특히 최고 권력의 향방을 결정하는 투표에서는 이게 두드러진다. 70%는 기본이고 95%도 예외가 아니다. ‘남들’에게는 말도 안 되지만, ‘우리’끼리는 너무도 당연하여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보다는 반역과 배신의 30%와 5%가 괘씸하여 대체 어느 인간일까, 평소에 미심쩍던 자들을 손으로 꼽으며 물 고문할 궁리하며 히죽거린다.

1948년 건국과 더불어 대한민국은 새 역사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과거는 현재에 비해 아득히 초라해졌고, 현재는 미래에 비해 이내 빛이 바랜다. 변화가 얼마나 심한지 5년만 외국에 살다가 귀국하면 절친한 동창 집은 말할 것도 없고 부모형제 집도 찾기 힘들다. 국내에 사는 사람이 이사 가지 않아도 주변이 확 바뀌어 예전에는 곤드레만드레 상태에서도 잘만 누비고 다니던 골목에서 끝내 방향을 잃고 동네꼬마의 손에 들려 있는 내비아가씨에게 물어봐야 한다. 외국인은 이를 한국의 역동성(dynamic)이라고 말한다. 연속극과 연극조차 한국에선 미래로 치닫는 현실의 연속극과 연극을 미처 따라가지 못한다. 아무리 대단한 사건사고도 열흘 넘기기 어렵다. 내란음모의 수(首)도 금방 잊히고 차관급 55명을 거느린, 고작 댓글 3개로 친북좌파로부터 나라를 3번 구한 박다르크의 청와대를 음흉한 닉슨의 백악관으로 환유(換喩)할 있는 사실상 권력의 최고봉도 한국의 뉴스 빌보드 차트에서 일주일 이상 정상을 지키기 어렵다.

아무리 현실이 대단하고 미래는 더 기대되어도, 그러나, 한국인의 마음 달력은 그대로이다. 1945년에서 1948년 사이에 머물러 있고, 1910년에서 1945년의 뒤숭숭 꿈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원히 불가능한 역사적 가정(假定)의 리모컨으로 역사의 비디오를 되돌린다. 닳고 닳도록 흑백 다큐멘터리에 비가 줄줄 새도록 되돌린다. 땅을 치고 한탄하며 공자의 이상향과 마르크스의 이상향을 버물려 빚은 프랑켄슈타인의 이데아 제단에 경이적인 새 역사의 피 뚝뚝 심장을 꺼내 희생양으로 바친다. 그러다가 문득 스탈린의 꼭두각시 김일성의 이상향과 국제 정세에 순진무구하게 어두웠던 김구의 이상향을 버물려 ‘역사를 바로 세우고’ ‘제2의 건국’을 선언한다. 지연과 학연이란 봉건주의 더하기 공천장사란 금권정치로 권력을 잡은 주제에 민주와 정통성과 청렴결백을 독점하고 그 이전 정권은 모조리 독재로 몰아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쪼갠다. 채찍을 꺼내 시체에 매질한다.

과거 지향적인 문화를 1천년 만에 현실 지향적 또는 미래 지향적 문화로 바꾼 불구대천 정적을 과거 지향적 문화의 잣대로 생활총화시키고 여론재판한다. 대신 조선시대보다 지독한 과거 지향적인 문화로 퇴보한 전체주의 독재의 21세기 세계 유일체제 북한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 정도의 민주 잣대(원시적 법치)도 안 대고, 민족 지상주의(신석기시대적 혈연)를 내세워 무조건 무한리필로 용서하고 온갖 편법을 동원하여 갖다 바치고 또 갖다 바친다. 안 바치는 자들은 민족 반역자라며, 시대착오적인 냉전주의자라며 허연 이빨로 위협한다. 다른 한편으론 줄기차게 일본의 사과를 요구한다. 그러다가 ‘요시!’ 일본의 과거사 사과 언질 한 마디에 덜컥 독도를 중간수역에 집어넣어 독도의 미래를 사실상 해양 초강대국 일본에게 넘겨 버린다. 그러고도 독도 얘기만 나오면 반일의 죽창을 일제히 치켜들어 청천욱일(晴天旭日)을 찌른다.

1980년대부터 대한민국의 역사는 특히 현대사는 왜곡될 대로 왜곡되기 시작했다. 용어만 세련되었을 뿐, 큰 틀에서 북한의 역사 서술과 비슷해졌다. 일본의 한국사 왜곡은 이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다. 민주와 민족의 이름으로 강만길을 선두로 해서 자유민주 대신 인민민주를, (박정희)민족 대신 (김일성)민족을 역사 기술의 기준으로 삼는다. 김일성이 두 악마적 외세를 끌어들여 일으켜 300만이 희생된 6.25는 선사시대로 밀려나고, 대신 아직도 객관적 서술은 고사하고 객관적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군경 포함 200여명 희생된 5.18이 영원한 현재의 아픔으로, 과거 장악으로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장악하는 꽃놀이패로 떠오른다. 알고 보면 광주시민의 명예를 회복해 줄 5.18 북한군 개입설은 신성모독으로, 독재잔당의 정신분열증으로 치도곤된다. 일망타진된다. 양심의 가시를 이기지 못한 사람을 출연시킨 방송사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즉각 관절이 상할 만큼 무릎을 꽝 꿇어야 한다. 그 사이 20여년이 되도록 300만의 정치적 아사(餓死)는 애완용 금붕어 한 마리의 자연사에 쏠리는 시청자의 관심도 못 받는다. 진실의 풍선 하나 못 날리게 가로막는다. 미식 축구하듯 온 몸으로 전쟁하듯 세상의 온갖 욕설을 총동원하여 가로막는다.

슬그머니 국사 교과서가 국정에서 검인정으로 바뀌면서 민중사학이 역사를 100% 장악한다. 2008년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서 몇몇 우국인사들이 한국의 현대사를 세계적 관점에서 조명한 목소리를 작지만 강하게 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아쉽지만 2013년에 8종 중 겨우 1종이 민중사학의 어둠에서 벗어나 정통사학의 새벽을 울렸다. 그러자 즉시 1억분의 3의 사실(영국은 5백만분의 18만)로 100일간 대한민국을 마비시켰던 그 솜씨 그대로 벌떼 공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친일파와 군사독재 찬양이라며, 식민사관과 군국주의사관이라며 인터넷과 방송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개탄하기 시작했다. 전화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유신시대도 아시아 3위(일본, 인도, 한국의 순, 대만은 1949년부터 1987년까지 계엄령)의 자유민주를 보장한 한국에 대해선 독재 언급 25번! 2천만을 19세기 아메리카 흑인노예보다 못한 노예로 전락시킨 북한에 대해선 독재 언급 5번! 이것이 7종의 현주소인데, 그것을 민족정기를 드높이고 민주주의를 찬양한 현대사 기술이라고,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교육부장관은 국사를 수능 필수로 지정한다고 애국의 북을 두드렸다만 8권 중 1권이라도 국사 교과서를 읽어 봤는지, 그들의 벌떼 면담에 정신이 얼떨떨해져서 그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는 중요하다.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을 보면 과거가 얼마나 중요한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과거 중 현재의 정파적 이익에 부합되는 극히 일부분만 꼴라쥬(collage)해서 전체 흐름을 외면하고, 마르크스 사관에 따라 해방공간의 과거를 스탈린의 꼭두각시에게 상납하고, 일제말 군국주의보다 지독한 북한의 독재에 대해서는 고조선의 청동기시대에도 안 통하던 민족지상주의로 얼버무리고, 공격의 화살을 온통 20세기 후반 세계 최대 기적의 나라, 우리 모두의 조국에 대해서는, 7천만의 조국에 대해서는 하나에서 열까지 헐뜯음을 지식인의 양심으로 종교적 믿음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고의든 선의든 조국의 현재와 미래를 암담하게 하는 짓이다.

이제는 시대에 걸맞게 과거 못지않게 현재와 미래도 중시해야 한다. 사실 문화는 한두 세대에 바뀌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두루 세계를 바라보고 그들의 발전과정을 제대로 공부하고 세계적 관점에서 대한민국을 새로 보고 우선 한국의 역사를 새로 정립해야 한다. 국사 교과서는 다시 국정으로 바꾸고, 현재 국사 교과서는 전면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특히 8종 중 7종을 대대적으로 수정해야 한다. 그들은 역사계와 문화계의 절대다수 동조자를 믿고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일방 매도하면서, 북한의 독재자를 OO위원장으로 부르게 만든 정권만은 꼭 집어 대한민국의 위대한 민주민족정부로 찬양한다.

다행히 이미 한국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추상적 정파적 이익과 관계없으면, 실지 언행은 좌파든 우파든 과거 지향에서 급격히 현재 지향과 미래 지향으로 바뀌고 있다. 이젠 친조카라도 상경하면 삼촌댁에 하루 이틀 머물면 많이 머문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 공짜 하숙시켜 주는 삼촌은 서울 하늘의 별처럼 희귀한 사람이다. 생전 처음 보는 동창이 선배라며 또는 후배라며 허섭스레기 물건을 팔러 오면, 이젠 대개 시큰둥하니 본 척 만 척한다. 고향 친구라도 자신을 이용하려는 기색이 보이면 싸늘하게 외면한다.

(2013. 9.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