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의 역할은 어느 정도일까?

지도자는 국민을 어느 정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왜 어떤 시대와 나라에는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고 어떤 시대와 나라에는 범상한 지도자 또는 형편없는 악마급 지도자가 나올까?

지도자는 국민으로부터 나오게 마련인데, 그렇다면 지도자는 국민의 수준을 넘지 못할까? 위대한 국민만이 위대한 지도자를 낳을까?

한국과 북한은 똑같은 문화와 똑같은 언어와 똑같은 역사를 공유한 민족인데, 2차대전 후 왜 한쪽은 태양이 솟아오르듯 불과 15년 전까지만 해도 전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발전을 거듭했고 다른 한쪽은 밑바닥이 없는 지옥으로 자유낙하하듯 지금도 가장 비참한 퇴보를 거듭할까?

그것은 지도자의 차이일까?

줄 서기 차이일까?

왜 오랫동안 똑같은 공산권이었음에도 중국은 달러로 세계를 놀라게 하고 북한은 핵으로 세계를 놀라게 할까?

 지도자와 국민의 관계는 서로 뒤엉켜 있어서 원인과 결과, 앞섬과 뒤따름, 오름과 내림이 어느 쪽인가를 가려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하여 여기에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 회의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이 어머니 ‘대지’라면 지도자는 아들 ‘인간’이다. 인간이 대지를 떠나서 태어날 수도 없고 살아갈 수도 없듯이 지도자도 국민을 떠나서 태어날 수도 없고 살아갈 수도 없다. 이처럼 지도자는 분명히 국민의 아들이지만, 스스로 의지를 갖고 우뚝 자라서 국민을 이끌어갈 수도 있다. 국민의 대지는 거의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국민의 대지가 낳은 아들이 장성하면 그 아들에 의해 무수한 갈등이 해소되고 일단 어떤 방향이 잡히는 순간 빠르면 한 세대 이내에 천지개벽하듯 바뀔 수 있다. 이때의 변화는 어느 선을 넘는 순간 불가역성(不可逆性)을 지녀 되돌아갈 수 없다. 일시적으로 뒷걸음치는 경우는 있다.

 지도자는 국민과 동떨어져서 느닷없이 나타나진 않는다. 지도자는 여기서 단수로 쓰인 듯한데, 실은 복수의 사람이다. 변화의 바람은 새로운 지도자 그룹이 형성되는 데서 시작된다. 이 지도자 그룹 중에서 운이 좋은 국민은 뛰어난 지도자를 만나고, 그렇지 못하면 포장은 화려하지만 속이 텅 빈 무능력하고 사악한 지도자를 만난다. 변화의 바람은 내란, 전쟁, 자연 재해, 역병, 인구 이동, 생산력의 증대, 과학기술의 발달, 강대국과의 접촉 등으로 급격히 진행되는 수가 많다. 이전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통하지 않을 때, 시대를 앞서가는 지도자 그룹이 형성되거나 시대를 역행하는 엉터리 지도자 그룹이 형성된다. 지도자는 군사와 정치에서 제일 먼저 두각을 나타내지만, 그들을 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사상가이다. 사상가는 비슷한 방향성을 갖는 경우도 있지만, 정반대되는 쪽에 이상향이 있다고 확신하는 자들이 팽팽히 맞서는 경우가 더 많다. 여기서 한 민족 또는 한 국민의 운명이 결정된다.

 사상은 현실에 적용해 보아야 검증된다. 20세기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사상가는 싫건 좋건 마르크스다. 공산주의만이 아니라 자본주의도 그의 사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농업사회는 2천 년 이상 또는 천 년 이상 동양에서는 불교와 유교, 서양에서는 기독교, 중동에서는 이슬람교가 사상으로서 충분히 사회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를 길러 낼 수 있었다. 산업사회에서는 더 이상 그렇지 못했다. 이때 등장한 사상가가 마르크스다. 과학과 논리로 무장한 그는 산업사회의 지식인들에게 상상력의 극한을 보여 주었다. 그의 사상을 능가하는 자가 공산권에서는 물론이고 시장경제권에서도 등장하지 못했다. 전적인 찬성이냐 부분적인 찬성이냐, 주석(註釋)이냐 해석이냐, 차이는 그 정도였다. 전적인 반대에는 어디에도 없었다. 공산혁명은 아니더라도 그의 평등사상은 이미 그가 등장하기 전부터 선진공업국인 영국과, 자유와 평등이 처음부터 국가 이념이었던 이민 국가 미국에서는 이미 정책적으로 광범위하게 도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후에는 공산권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평화적인 방식으로 사회보장제도와 보통교육과 노동조합과 농가보조 등은 천부인권처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제도는 다 근본적으로는 올바른 것이지만 그것이 마르크스 사상을 토대로 하여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올라선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재정적자가 아무리 늘어나고 실업률이 아무리 올라가도 타협의 여지는 아주아주 적다. 혜택을 받는 자들이 약자의 이름으로 공고한 기득권자가 된 것이다.

 공산권의 몰락 후에도, 마르크스의 사상이 검증을 통해 파산한 후에도 교과서적 평등 내지 이론적 평등은 그 매력 또는 마력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권력은 물질에서 나온다는 마르크스의 사상은 조금도 빛을 잃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선진국에서 새로운 지도자 그룹이 나타나지 못한 원인이다. 인구 3억의 대국으로서 1인당 GDP도 최상위권인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마르크스의 사상이 당헌(黨憲)을 앞서는 미국의 민주당은 학계와 언론계와 예술계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들은 양심의 거울에 비추어 하나 부끄러움이 없다. 공화당이라고 하여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기껏 시장경제와 작은 정부를 부르짖을 뿐, 그 정책에서는 오십보백보다. 더군다나 최근에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집중적으로 매를 벌고 있다.

 한국만큼 지난 반세기 동안 극적인 변화를 겪은 나라도 드물다. 그러나 그 변화에 걸맞은 지도자 그룹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 지도자 자격은 없지만 지위 상으로는 지도자인 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혜택을 절대 양보 못하지만, 그들에게 자유와 풍요와 평등과 행복과 권력을 가져다 준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하나에서 열까지 비난하거나 하나에서 일곱 여덟까지 한국의 성취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마르크스를 능가하는 사상가를 배출하지 못해 여전히 마르크스의 손바닥 안에서 노니는 서양은 그래도 법과 질서와 관습과 상식이 제도화되어 크게 흔들리지는 않는다. 한국은 앵무새 사상가뿐 사상가가 아예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거기에 더하여 법과 질서와 관습과 상식이 막 정착되는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20세기 초반과 중반에 급격한 산업화를 이룬 후발 산업국가 독일이나 일본이 군국주의나 국가사회주의에 일시에 장악되었던 것처럼, 과분한 발전에 정신을 못 차린 한국은 마르크스만이 아니라 수령절대주의(주체사상)에도 마구 흔들린다. 동족의 나라인 오스트리아를 선전선동과 위협과 무력으로 강제합병하던 히틀러의 민족주의도 한국에선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다.

 자신들이 바로 김정일의 척결 대상 제1호는 아니더라도 제2호는 틀림없다는 것도 그들은 모르고 있다. 무조건 합치면 무조건 잘된다고 본다. 모든 게 분단에서 비롯되었으므로 민족이 하나로 통합만 되면 모든 게 절로 해결된다는 순진무구한 또는 사악한 생각을 갖고 있다. 북한의 굶주림과 군국주의와 수령절대주의와 인권유린은 어느 쪽이든 통일 의지가 강한 쪽에서 주도하여 통일만 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순진무구한 또는 사악한 생각의 별을 가슴 깊숙한 곳에 달고 다닌다. 핵을 머리에 이고도 미사일을 등에 지고도 무조건 달래기와 너그럽게 퍼주기에 대해 반성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모든 비난을 국내의 정적에게, 돈키호테가 풍차와 양떼에 돌진하듯 그들의 관념세계에서만 존재하는 친일파 후손과 군부독재의 앞잡이들에게 덮어씌운다.

 쓸데없이 비장하게 ‘사운드 오브 뮤직의 에델바이스’를 부르지 말고, 그냥 신나게 ‘로엔그린의 결혼 축가’를 부르면 절로 7천만의 운명이 바뀐다고 순진무구하게 또는 사악하게 생각한다. 모든 책임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골고루 자유와 평등과 풍요와 행복을 가져다 준 주역들에게 덮어씌우고 그들과 그들의 동조세력을 국가 지도자 그룹에서 완전히 배제하면, 일본이나 중국에 맞먹을 위대한 민족국가가 탄생할 것이라고 순진무구하게 또는 사악하게 생각한다. 이들은 방송과 신문과 인터넷, 영화와 소설과 시와 연극을 광범위하게 장악하고 있다. 어떤 작은 사건이라도 터지면, 백만 개 천만 개 정도의 촛불은 순식간에 밝힐 수 있다.

 무서운 일이다. 자다가다 수시로 벌떡벌떡 일어나 식은땀을 훔칠 만큼 무서운 일이다.

(2009. 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