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인재도 때를 만나지 못하면, 눈길 한 번 못 받거나 손가락질 받으며 산다. 때를 만난다는 것은 이중의 의미가 있다. 시대가 좋은 것도, 시대가 나쁜 것도 인재가 잠재력을 발휘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다만, 호시절에는 새 인재도 기성세대와 재능이 비슷할수록 좋으니까, 쉽게 눈에 띄고 그만큼 능력을 개발하기도 쉽다. 위기에는 그렇지 않다. 호시절에는 범인이나 바보나 괴짜로 취급받던 사람이 위기에는 위인이나 천재나 선각자로 각광받는다. 위기는 기존의 방식이 통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니까, 인재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재능을 가져야만 그 위기를 돌파하고 새 시대를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위기는 숨은 인재를 부르지만, 잠룡(潛龍)이 쉽게 드러나진 않는다. 위기를 불러일으킨 자들이 여전히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권력을 잡고 이들이 잠룡의 입을 막고 손발을 묶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내 뜻을 펼 때가 왔다고 섣불리 잠룡이 고개를 드는 순간, 승천하는 용이 아니라 꼴값하는 미꾸라지 취급을 받고 바로 생명을 잃는 수가 허다하다. 그렇게 하여 위기는 더 큰 위기로 발전한다. 정치든 경제든 호언장담과는 정반대로 기존의 권력이 종이호랑이로 전락할 때까지 용의 자식은 여전히 주목을 받지 못한다.

 절망의 한말(韓末)에서 반짝 희망의 해방공간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은 위기가 아닌 해가 한 해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행히 한국은 동족상잔의 참화를 겪은 이후 곧 절망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후부터 새 시대의 숨은 인재들이 때를 만나기 시작했다. 4천 년 농업시대를 끝장내고 마침내 산업시대를 여는 인재들이 우후죽순처럼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재들이 정부와 산업계에서 눈부시게 활약했다. 학교에서는 이런 인재를 대량 공급했다. 특히 이전에 말할 수 없이 천대받던 이공계열에서 과학기술과 합리적인 사고로 무장한 인재들이 정부의 체계적인 계획과 지원에 힘입어 공고와 공대와 자연대에서 쏟아져 나오면서, 이들은 가발공장과 철공소에 머물던 노동집약적인 산업에서 불과 한 세대 만에 철강과 석유화학, 조선업, 자동차, 전자 등에서 세계와 어깨를 겨루는 기업을 일구는 데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다시 말해서 대한민국의 교육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다. 교육 수준이 낮았던 동서남아시아나 중남미, 아프리카는 한강의 기적을 멀뚱멀뚱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대만과 싱가포르와 홍콩은 규모는 작았지만, 한국의 교육과 대등했기 때문에 한국과 더불어 아시아의 4룡으로 불릴 수 있었다.

 공산권의 몰락도 가장 큰 원인은 산업시대에 걸맞은 인재를 키우지 못한 탓이다. 관념적인 평등과, 세계적인 수준과는 동떨어진 자립형 과학기술의 강요로 그들은 숨은 인재의 등장을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이런 문제점을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이 공산권에서는 등소평이었다. 모택동이 모택동 어록으로 질식시켰던 수학과학과 기술과 기업가 정신을 등소평은 대대적으로 발전시키고 장려했다. 무엇보다 그는 이공계 출신들을 최고위직에 속속 발탁했다. 국가 서열 100위 이내에 드는 자들 중에 이공계 아닌 자들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 결과 한강의 기적에 이어 양자강의 기적이 태어났다. 그 기적은 현재진행형이다.

 한국은 1990년대부터 서울대 공대와 자연대의 영광이 급격히 시들기 시작했다. 의대로, 법대로

숨은 인재들이 아인슈타인과 소크라테스의 꿈을 잃고 배부른 돼지나 엉터리 지식으로 대중에 영합하는 소피스트의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했다. 386세대로 대표되는 자들이 대학과 출판과 노조와 시민단체에서 문화권력을 휘어잡으면서, 다시 이들이 봉건주의를 민주주의라 강변하는 정치꾼들에게 민족과 평등의 신기루를 가리키며 갈등과 투쟁의 이념을 제공하면서, 한국은 중국과 달리 시대와 역행하는 인간들이 새로이 다가오는 지식정보시대를 욕설과 생떼와 궤변으로 혼란과 불확실과 불신의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1980년 광주사태를 계기로 한국의 지식인이 알게 모르게 자유민주에서 사회주의로 기울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한강의 기적에 침을 뱉으면서, 12만 제곱킬로미터 전체가 유태인 수용소와 다를 바 없는 북한에 무한신뢰의 따뜻한 손과 절대침묵의 자물쇠 입과 무조건 화해의 꽃다발을 갖다 바치면서, 새로이 지식정보시대를 열 잠룡들이 미꾸라지 취급 받고 이무기 대접 받았다. 대중을 미혹하고 대중에 아첨하는 자들이 정당을 불문하고 우르르 국가 최고 권좌에 오르면서 한강의 기적을 낳은 원동력이 된 대한민국의 교육은 모조리 부정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데는 아예 관심도 없고 오로지 인기에 급급하여 기껏 100전 100패의 사교육 때려잡기밖에 없고 말만 거창하게 과학기술입네 연구개발입네 했지, 그 흔한 갈라먹기 식 아무나 장관 자리에 이공계 출신 한 명이나 두 명 있으면 다행이다.

 세계최대 부국이 대공황 이후 가장 큰 경제위기에 처하면서 전 세계가 휘청거리고 있다. 현재로서는 중국이 가장 낫다. 빈부격차, 후진정치, 사회불안, 인권탄압 등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중국은 숨은 인재를 가장 많이 길러놓았다. 소년반이라는 영재들만 해도 수십만이다. 이미 중국은 세계최고 수준의 과학기술을 높은 지능과 탄탄한 기초교육과 무서운 끈기로 무장한 미국 유학생으로 야금야금 접수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국가 지도자들은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100년, 1000년 앞을 내다보고 팍스 시니카(Pax Sinica)를 건설하기 위해 일치단결하여 애쓰고 있다. 여차하면 그들은 고구려의 마지막 고토도 제2의 티베트로 만들 요량이다. 한국의 친북좌파들이 중국의 노골적인 북한 감싸 안기에는 가을날 황금 햇살 같은 추파(秋波)를 던지고 제 앞가림하기에 급급한 미국의 허풍과 부탁에는 발끈하여 사사건건 오뉴월 서리 같은 눈길을 쏘아붙이면, 그들의 홍위병 권력투쟁에 국가와 국민의 경찰이 매나 맞도록 정부가 나직이 ‘아침이슬’을 부르며 방관하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

 한국은 어떤 나라보다 위기에 대처할 숨은 인재를 많이, 절실히, 당장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에서도 설 자리가 없다. 정부에도 사회에도 교육에도 정당에도 그들은 바보나 괴짜 취급이나 받는다. 아니면, 종 취급 받는다. 아니면, 개혁 대상으로 몰린다.

안보위기, 경제위기, 교육위기가 겹친 이 위기는 점점 커질 것이다. 제2의 육이오 같은 파멸적인 위기를 겪은 후에야 숨은 인재들이 나타날지 모르겠다.

 (2009. 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