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民에게 애국심, 정의, 공정을 바란다는 것이 공념불임을 다시 깨달았다. 나는 평생을 군인으로 산 사람으로 민간 국방장관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현역 시절에 군 출신 국방장관의 병폐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군 출신 국방장관은 군을 잘 알기에 군복을 입은 각 군 총장의 권한을 침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강요까지 했다. 또한 장관은 정무직으로 정치권인 대통령, 국회의원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므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그러다 보니 정치권이 청탁하는 인원을 각 군 총장에게 진급을 요구하였다. 각 군 총장은 국방장관과 인연으로 인하여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는 각 군 총장이 본인이 원하는 1명의 인원을 장군으로 진급시키기도 버겁다고 했다. 워낙 정치권에서 요구하는 인원이 많아서 그랬다. 그뿐만 아니라 선출직인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특성상 그들이 요구하는 인기 위주의 정책을 국방장관은 들어 주기 위해 각 군 총장들에게 강요하였다.

군의 전문성은 무시되고 오로지 정치가 군의 인사와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각 군 총장이 무력하게 국방장관의 지시를 들어주는 것은 장관과의 인연 때문이다. 선후배일 경우도 있고, 근무연(緣)도 있고, 심지어는 국방장관이 본인을 승진시켜준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민간 출신이 국방장관이 되어야 한다고 줄곧 주장했다.

특히 12·3 계엄사태를 보면서 군복을 입은 사령관들이 군 출신 국방부장관과 근무 인연으로 인하여 비판없이 명령을 따르는 것을 보면서 더욱 그러하게 느꼈다.

나는 민간 출신 안규백이 장관으로 임명되어 기대가 컸다. 하지만 이번의 안규백 국방장관의 행실을 보면서 너무 실망이 크다. 군을 모르므로 각 군 총장들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이들에게 독립성을 보장할 줄 알았다. 하지만 기대와는 너무 달랐다. 또한 후배 각 군 총장들도 장관이 요구하는 대로 진급 추천을 하였다. 역시 인간은 권력 앞에 나약한 존재인 모양이다. 실망이 크다.

안규백이 군의 특성을 생각하고 국가의 안전과 군대의 임무를 생각한다면 항명을 한 인원을 진급시키고, 정권의 입맛에 맞는 인원만을 골라 진급시킬 수는 없다.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유능한 사람을 진급시켜야 한다.

이런 만행을 보면서 나는 내가 잘못 판단했다고 생각한다. 후회막심하다. 역시 우리나라 민간 문민에게 애국심, 정의, 공정을 바란다는 것이 공념불임을 다시 깨달았다. 조선조 역사의 양반들의 위선, 파당성을 보고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내가 착각을 한 것이다. 역시 걸레는 빨아도 걸레다. 이런 인간들이 나라를 운영하는 지도자로 있다. 국가의 앞날이 캄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