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雜草)라고 부르기 미안했다. <바위에 떨어진 씨앗 같은 인생>

까까머리에 검정 교복을 입고 안국동을 걸어 다니던 경기고등학교 시절 우리들은 한 콩깍지에 나란히 있는 파란 콩알 같았다고 할까. 앞으로 세상에 나가면 무엇이 될까 하는 꿈에 부풀었었다. 어느 순간 깍지가 터지고 우리는 각자 자기의 땅에 떨어졌다. 성경 속 비유처럼 기름진 땅에 떨어지기도 했지만 바위나 가시덤불에 던져지기도 했다.

이십년 전 여름이었다. 나는 원남동에 있는 서울대병원 건물의 어두침침한 지하실로 내려갔다. 한 남자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산더미 같은 기계 부품들 가운데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병원 관리실의 기계 수리를 하는 기사였다. 고교 동기인 그를 만나러 간 것이다. 병원 지상에서 흰 가운을 입고 교수로 앉아 있는 다른 동기생과 대비가 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기계를 고치던 그 친구와 점심시간 근처 식당으로 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그가 이런 말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 사업이 폭삭 망했어. 나도 서울대 입시에서 떨어지고 말이야. 당장 먹고 살 수도 없는데 대학 갈 형편이 못됐지. 그래서 전선을 만드는 회사에 공원으로 들어갔어. 선반으로 기계를 깎는 작업을 맡았는데 경기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니까 모두가 놀라더라구. 상관은 나보고 경기공업전문학교를 나온 거 아니냐고 확인하더라구.”

그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은 말이었다. 세상은 명문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콘베이어 벨트를 탄 것처럼 모두 잘되는 걸로 착각했다. 그는 조용히 다음 말을 이었다.

“그냥 현실에 적응하기로 했어. 선반으로 기계 깎는 게 바로 도사가 되어 버리더라구. 다음에는 기술부로 가서 전자교환기를 다뤘는데 3년쯤 되니까 거기서도 도사 소리를 들었어. 내가 설계부터 시작해서 전자회로 기술자가 되어 버린 거야. 일본 후지츠 제품을 들여오는데 일본 기술자와 직접 논의도 하고 그랬지. 기술자로 소문이 나니까 그 다음은 서울 대병원 의료기계 수리공으로 스카웃된 거야. 어려운 기계에 처음으로 부딪쳤어. 그때 전국 대형병원의 의료 기계들이 막 섰어. 기계를 제조한 외국 본사에서 기술자가 오기 전에는 고치는 게 불가능했어. 왕복비행기표에 호텔을 얻어주고 시간당 100불을 줘야 하니까 꽤 비쌌지.

정규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공부했어. 미국을 오가는 사람한테 부탁해서 의료공학에 관한 책을 구했어. 일본 책도 구하고. 전자기기에 관한 건 많은데 의료기기에 관한 건 별로 없었어. 유명한 저널도 구해봤어. 서울공대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도 구해 독학했지. 전부 영어로 된 것들이었어. 공부하느라고 밤을 새고 10일 이상 집에 들어가지 않은 적도 있어. 마침내 의료기기에 대해서도 도사라는 말을 듣기 시작했어. 설계 미스나 고장의 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방안을 찾은 거야. 나 혼자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멈춘 의료기계들을 고쳤어. 당시는 임상병리장비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 전국에 있는 의료기계를 개조해서 관리했지. 임상병리과에서는 내가 개조한 걸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하고 말이야. 외국 기업들이 큰 돈을 요구할 때 독자적으로 전국 병원의 의료기기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했어.”

그가 신나게 말하다가 순간 얼굴에 그늘이 스치는 것 같았다. 그가 이런 말도 했다.

“더러 슬플 때도 있었어. 병원 지하에서 26년을 일했는데 의사들이 귀족 의식을 가지고 무시할 때는 섭섭했지. 학력이 고졸이라는 자격 문제도 꾸준히 따라다녔어. 뒤늦게 방통대 전산학과에 등록했지. 그리고 나서 서울공대 박사과정을 아들뻘 되는 아이들과 같이 공부했어. 지금은 국제공인학회지에 실릴 논문을 준비 중이야.”

나는 마음속으로 그에게 박수를 쳐 주었다. 그리고 그와 헤어진 지 이십 년이 흘렀다.

어제 오후 산책을 나가는 길에 길가 바위틈에서 무성히 자라나와 노란꽃을 활짝 핀 잡초를 보았다. 이름을 몰라서 그렇지 잡초라고 하기가 미안했다. 누가 심고 가꾸지도 않았다. 날아온 씨가 우연히 바위에 떨어져 그 좁은 틈새에서 혼자 컸을 것이다. 그걸 보면서 오래전 만났던 그 친구를 떠올렸다. 그는 기술자로 그 후 더 보람 있는 일을 해 낸 것 같았다. 그 얘기는 다음에 써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