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서 법을 만드는 권력만 있으면 굳이 혁명을 할 필요도 없어요." 이천년대 초 국회에서 친일파의 재산을 환수하는 법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헌법은 뒤늦게 법을 만들어 재산을 뺏지 못하도록 못박고 있었다. 국회 공청회에서 헌법학자 김백유씨가 말했다.

“헌법 위반입니다. 국민감정을 앞세워 재산을 몰수하는 법을 만드는 것은 안 됩니다. 그런 법을 만들려면 먼저 헌법을 개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법률가 출신 국회의원들의 의견은 이랬다.

“급조된 위원회가 친일파를 색출하고 재산권 빼앗는 것은 국가 시스템을 무력화시키는 게 아닌가요?”

시대의 파도가 법치의 둑을 때리고 넘어섰다. 국회 다수석을 차지하는 당은 법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그 법에 따라 생긴 위원회의 기세가 등등한 것 같았다. 나는 그 위원회를 찾아갔다. 일제시대 동아일보와 고려대학교를 설립하고 민족지도자였던 김성수 집안의 변호를 맡았기 때문이다. 위원장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위원회가 법상 일방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걸 알고 있죠? 우리가 친일파로 찍으면 친일파가 되고 재산을 몰수할 수 있는 겁니다. 당하는 측에서 그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도록 되어 있는데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이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사회여론이 그렇고 법원의 판사들도 우리 편인데 말이죠.”

권투선수의 한쪽을 묶어놓고 상대방이 마음대로 패도록 하는 것 같이 법이 만들어졌다. 국민감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만주 유랑 농민의 자손이었다. 그러나 법치국가라고 하면서 법을 그렇게 만들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법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도 친일파였다. 국무총리 신현확도 친일파였다. 이 땅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상징하는 인사들이 대부분 친일파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정치인이 된 후배 변호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국회에서 법을 만드는 권력만 있으면 굳이 혁명을 할 필요도 없어요. 예를 들어 2퍼센트의 부자들 재산을 뺏는 법을 만들면 98퍼센트 국민들이 박수를 칠 거 아니야. 굳이 법을 만들지 않고 법조문을 바꿔 세율만 확 높여도 되죠. 저항하는 부자들은 모두 조세범 처벌법 위반으로 감옥으로 보내면 되요. 사형이고 무기징역이고 법으로 정하기 나름이죠. 어때요? 간단한 세법조항 하나가 국가보안법보다 더 무서울 수 있죠? 국회의원 숫자만 확보하면 헌법도 고칠 수 있어요. 헌법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인민민주주의라고 하면 어떨까? 단어 하나로 체제를 바꾸는 혁명이 성공한 거 아닐까? 헌법 조문 중에는 이미 경제민주화부터 시작해서 사회주의적인 요소들이 들어와 있죠.”

그 무렵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을 지냈던 고교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지금은 모든 권력이 국회로 넘어갔어. 어떤 정책도 법률이 만들어져야 하잖아? 그래도 권위주의 정권 시절은 정부부처에서 기획을 하면 하다못해 유정회를 통해서라도 법이 통과됐어. 그런데 지금은 그게 전혀 안돼. 좋은 정책을 실현시키는 법이면 반대당의 입장에서는 표를 빼앗길까봐 해줄 수가 없고 나쁜 거는 나빠서 안 되는 거지.”

국회에서 법을 한 줄 바꾸면 그 많은 법 교과서와 판례들이 하루아침에 휴지가 됐다. 나는 왜 법을 공부했을까 하는 상실감이 들었다. 혁명과 잔인한 폭력이 법이라는 점잖아 보이는 탈을 쓰고 세상을 배회하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학봉 의원한테서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전두환 정권에서 운동권 출신들을 모두 없애려는 입법을 시도한 적이 있어요. 그들을 미리 없애지 않으면 언젠가 보복을 당할 걸 예상한 거죠. 원래 복수의 싹은 철저히 밟아 버려야 후환이 없는 겁니다. 우리는 일본이 운동권을 때려잡는 걸 벤치마킹했죠. 일본을 보면 법을 만들어 철저하게 운동권을 청소했죠. 운동권이 숨은 깊은 산 속까지 따라가 소리 없이 다 총을 쏴서 죽였죠. 우리도 그렇게 하려고 했어요. 그러다 전두환 대통령이 법을 만드는 걸 포기했죠. 거기서 땅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전두환의 운명이 예고된 거죠. 지금 이 나라를 잡고 있는 운동권 정치인들 당시 그 법이 통과됐다면 살아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몰라.”

섬뜩한 얘기였다. 히틀러도 유대인 척결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법을 만들어 수용소를 운영했다. 지금 국회에서 대량생산되는 법들은 어떨까. 영혼이 깃들어 있을까. 먼 앞날을 보고 신중하게 만들어진 것일까. 국민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들일까.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정적을 향해 시퍼런 칼날을 번뜩이는 법들이 보이기도 한다. 국회는 좋은 법을 만들어야 한다.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성경 속의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 안에는 따뜻함이 있고 세심한 배려가 있다. 그리고 영원한 정신이 있다. 그런 법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