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다 진주(晋州)여. 역시 진주다

진주에 가면 나도 따라 순수해지고 만다. 《지자체가 첫 위성 쐈다…진주시, 초소형 '진주샛' 발사 성공》이는 조선일보에 있는 한 기사 제목이다.

장하다 진주여. 역시 진주다. 과연 진주가 또 한 번 ‘지방 최초’임을 증명했다. 진주의 ‘개천예술제’는 지방 최초의 문화제다. 1949년 정부 수립 1주년을 기리고자 시작했는데 아직까지 성대히 이어지고 있다. ‘경남신문’은 지방 최초의 일간지로 창간되어 그 맥이 끊기지 않고 있다. 이젠 우주를 향한 ‘지방 최초’의 기록을 세웠으니 칭찬을 왜 아끼겠는가.

굳이 또 하나를 보태자면 ‘가요 황제 남인수’는 진주 사람이다. 그래서 KBS의 '가요무대'를 지방에서 개최하기는 진주가 유일했다. 하나 더 있다. 진주의 ‘남강유등축제’다. 전국 최초의 유등축제를 성공리에 연연이(年年이) 이어가자 서울이 그를 본따서 한강축제라는 유등축제를 열었었다. 그때가 아마 박원순 서울시장 때였을 것이다. 이에 진주시민이 항의했다. 나도 이런 말로써 서울을 꾸짖었다.

“나라의 동량지재(棟梁之材)들이 다 모인 수도 서울이 산골 촌구석의 축제를 베껴서 따라하며 제것이라 우기다니. 부끄러운 줄 알라.” 어쨌든 서울이 일말의 부끄러움은 있었든지 슬그머니 그 축제를 때려치웠다.

진주와 마산은 일시 원수처럼 서로 으르렁거렸다. 부산이 경남 도청소재지에서 부산직활시가 되자 진주와 마산이 서로 자기가 도부(道府)가 되야 한다며 싸운 것이다. 마산에서 비행기로 “도청은 마산으로”라고 쓰인 삐라를 온 시내에 뿌리면 진주도 질세라 그랬다. 시민궐기대회는 서로 수도 없이 열었다. 인구수는 마산이 배(倍) 가까이 많았지만 문화는 마산이 택도 없었다. 예를 하나 들면 중학교와 고등학교 입학시험 수준은 마산이 높았지만 서울대학교 진학률은 진주가 높았다. 그렇게 다투기를 계속하다가 전두환 대통령이 “그럴 것 없다. 도청은 창원으로 가라.”했다.

그 당시에는 진주와 마산 사이에 진양군이 가로막고 있었으나 진양군이 진주시와 통합되자 진주와 마산이 고개 하나를 경계로 맞닿아 있게 됐고, 그 고개 이름이 ‘발산고개’였으며 그 고갯마루에 ‘발산휴게소’란 휴게소가 하나 있었다. 장사가 아주 잘 되었다. 우습게도 그 당시는 진주와 마산이 너무 멀었기에 가운데에 자동차 휴게소가 있었던 것이다. ‘발산휴게소’의 영화도 사라졌다. 구도로(舊道路) 옆에 4차선의 고속화도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진주와 마산이 서로의 동네를 옆집에 마실다니듯 왔다 갔다 한다.

부산⸱마산⸱통영과 같이 바다에 기대 사는 사람들은 성정이 급하고 거칠다. 그리고 구라가 좀 있다. 반면에 진주와 같은 들판 지역 사람들은 느긋하고 순박하다. 꾸밀 줄을 모르고 싸울 줄도 모르지만 남다른 인정이 있다. 그래서 나는 진주에 갈 땐 진주 친구들 모르게 가만히 간다. 어쩌다가 길거리서 만나면 술 한 잔 하자며 억지로 팔소매를 끌어당긴다. “아니다. 내가 급하다. 그냥 가야겠다.”고 크게 거절하면, 자동차 기름값이나 하라며 호주머니에 돈을 억지로 넣어주고 뛰어가버린다. 볼 때마다 그런다.

나는 심심하면 통영과 거제에도 가지만, 진주에 가장 자주 간다. 촉석루 강 건너 저쪽의 길에 앉아 촉석루를 바라보면 높은 절벽 위에 별장을 지어 놓은 딱 그런 경승(景勝)이며 잔잔히 흐르는 남강을 보노라면 내 마음도 잔잔해지고, 진주에 가면 나도 따라 순수해지고 만다. 역시 지역이 성격을 만드는 것이다. 진주가 언젠가는 우주를 넘은 ‘지방 최초’를 또 만들 것이다. 진주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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