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살개 앞세우곤 좀 쓸쓸하다만∼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을사년 새 아침이다. 해운대 앞바다는 광망(光芒)으로 눈이 부시다. 파도는 잔잔한데 해맞이 인파(人波)들이 출렁거린다. 문자 그대로 인산인해(人山人海)다. 올 을사년은 푸른 뱀(靑蛇)의 해란다. 우리 전통문화 속의 뱀은 '두렵지만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다. 이승, 저승 오가는 신비로운 존재다. 어리석은 인간들 벌 준다고 여긴다. 알을 여러 개 낳아 다산(多産)의 상징이기도 하다.

역사 속의 '을사년(1905년)'은 우리에겐 공포와 두려움의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있었던 해다. 국가의 권능이 송두리채 일본에 넘어간 국치(國恥)의 해로 120년 만에 다시 찾아온 것이다. 국가의 아픈 상채기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새해 아침이라고 마냥 즐거워하며 희희낙락하고만 있을 수 없는 불안한 현실이다. 오늘의 시국(時局)이 암울하기만 하다. 어리석은 군주와 패악질만 하는 정치강도들의 패권다툼이 불안하게 하고 있다. 자유민주 세력과 좌파 종북사회주의 세력이 국운(國運)을 걸고 맞붙고 있다. 이러다간 '제2의 을사늑약'이 재현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민중은 우매(愚昧)하고 언론은 미쳐서 날뛰고 있다.

이런 새해 아침에 詩 한 수 읊으며 마음을 다스리고자 한다. 필자가 歲暮에 발표한 앙가주망 에세이 '개들의 반란'에서 삽살개 관련 시 한 구절을 소개한 바 있다. 경북 영양 출신의 시인 李00이 쓴 시에 '삽살개 너도 가자…'라는 구절이 있다고 소개했다. 독자 가운데 동아대학교 국문과 K명예교수가 전화로 '李00'이 누구이며 詩 제목이 무엇인지 물어 왔다. 자료를 찾아봤더니 '李00'은 경북 영양 출신 이병철(1918년생)이고 詩題는 '나막신'이다. 전문을 소개한다.

<나막신>

은하수 푸른 물에 머리 좀 감아 빗고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목숨 수(壽)자 박힌 정한 그릇으로
체할라 버들잎 띄워 물 좀 먹고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삽살개 앞세우곤 좀 쓸쓸하다만
고운 밤에 딸그락 딸그락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참 서정적인 작품이다. 시인 이병철(1918년생)은 1950년 이화여자중학교 국어 선생으로 재직중 사촌동생과 함께 월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공산치하의 북한에서 시인 이병철이 어떻게 살았는지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해방공간의 전위(前衛) 시인 이병철이 분단 비극의 장본인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이병철의 작품 '나막신'은 미 군정청 문교부 발행 중등 국어교본 상(1·2학년 소용 1946년)에 수록되기도 했다. 분단 비극의 희생이 된 이병철의 작품은 그로부터 사라진 것이다. 청록파 시인의 작품에 버금갈 정도의 문재(文才)가 이념이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행방불명된 사실은 우리 문단(文壇)의 커다란 손실로 評家들은 언급하고 있다.

을사년 새해 아침. 조갑제닷컴의 조갑제 대표와 가족 독자 여러분. 새해에도 건강 제일 하시길 앙축(仰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