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감옥에서 맞은 1991년 설날의 통곡

조반(朝飯)을 받아 들고 왜 그렇게 서럽고 슬펐는지… <통곡으로 맞은 설날 덕에 살아난 탈북 추억>

북한에서 1월1일은 설날이자 내 생일로 공민증에 기록되어 있는 날이다. 따라서 내 생일을 따로 쇨 필요가 없었다. 사실 설 3일 전에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3일 앞두고 나이 먹는 다고 1월 1일로 변경한 것이다. 탈북하여 남한에 와서는 정확한 날로 생일을 기입하였다.

북한에서 생일이란 항상 못 먹는 날 중에 가장 잘 먹는 날이기에 의미가 컸다. 어려서 집에 있을 때에는 어머니가 내 진짜 생일날 이팝(쌀밥)이라도 꼭 챙겨주곤 하였다. 어머니 이상 없었다. 하지만 커서는 집 밖에서 생일 쇨 때가 많아 누가 챙겨주는 이가 없었다. 생일이 설날과 겹치다나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 통에 나도 모르게 생일에 대한 감정이 무뎌졌다. 즉 생일을 못 기념했다고 울고불고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잊을 수 없는 설이자 생일날이 있다. 1990년 11월 19일 중국으로 첫 탈북 다음날 중국 경방대(국경경비대)에 붙잡혀 하루 만에 북송되어 맞은 북한 정치보위부 감옥(집결소)에서이다. 1991년을 맞는 설은 난생 처음 감옥에서 맞은 설이자 생일이었다.

그런데 조반을 받아 들고 왜 그렇게 서럽고 슬펐는지 나도 모르게 통곡하였다. 평시에 그처럼 날카롭던 정치 보위부 간수(계호원)들도 설 명절이어서인지 아니면 너무나 처량한 통곡이어서인지 가만히 있는다.

왜 통곡했을까. 이제 다시 살아서 나갈지 죽을지 몰라서인 것도 있다. 또한 감옥에 갇혀 보니 이 나라가 이 지경으로 인간을 대하는데 대한 통곡이었는지 모르겠다. 밤낮 부르짖는 인간 중심의 주체 사상이 가장 비참한 인간 학대의 현실을 직접 체험하였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때 맹세하고 맹세하였다. 만약 다시 살아 나간다면 차디찬 눈 속에 숨어서 한 생을 살지언정 절대 잡혀서 공화국으로 끌려가지 않으리라! 그때의 맹세 때문인지 기적적으로 석방된 후 재탈북한 후에는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잡히지 않게 인내하였다.

무보수 노동을 자처하였고 어린아이가 천대하여도 참기도 하였고 부당하게 폭행을 당해도 참았다. 하지만 천대도 폭행도 정도가 있는지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폭발하기도 하였다. 그 폭발력이 얼마나 센지 연길시의 유명한 깡패를 거꾸로 엎어놓고 죽여버릴 뻔도 하였다. 군내 읍 초등학교(인민학교) 씨름 선수였던 본능이 작동한 결과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정신을 차렸을 때는 잘못했다고 오히려 빌면서 그 자리를 부리나케 도망쳐 아슬아슬한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였다.

중국과 러시아 탈북 체류지에서 노예 같은 처지에 있었지만 그래도 북한 감옥에서 맞은 설날의 통곡을 잊지 않아서인지 장장 4년 간의 탈북 과정을 다시 잡히지 않고 서울에 올 수 있었다.감옥에서 맞은 설날 통곡이 아니었다면 자아가 살아난 충돌 속에 잡혀 북송되어 죽었을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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