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대한 原油 차단은 전쟁을 각오하고 해야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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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수소탄 실험 이후 일본을 중심으로 북한에 대한 기름 공급을 차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급부상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에서 논의될 전망이다  

북한은 석유를 수입에 의존한다. 90% 정도를 중국에서 사온다. 중국의 단동을 통하여 송유관으로 들어오는 원유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연간 약50만 t 정도라고 한다. 그 이외에 중국, 러시아, 이란 등을 통하여 수입하는 원유와 석유제품(휘발유 등)을 합치면 연간 150t 전후로 추산된다. 한국의 약100분의 1이다. 북한의 한 해 석유소비량은 한국의 1주일분도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북한에 대한 석유공급을 차단하는 것은 경제뿐 아니라 군사 부분에 치명적 타격을 준다. 중국도 이를 알기 때문에 斷油 조치를 거부하고 있다  

기름을 끊으려면 북한으로 들어가는 유조선을 감시, 차단해야 한다. 이는 군사작전이다. 중국이 기름을 끊고 미국이 항만봉쇄를 한다면 김정은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비핵화 협상으로 나올 것인가, 아니면 핵무기로 도발할 것인가?  

군사체제에 대하여 기름을 끊는다는 것은 일종의 선전포고로 간주되기도 한다  

1941년 여름 일본군은 프랑스의 비시 정부가 관리하던 인도지나 반도에 군대를 보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영국 및 네덜란드와 함께 일본에 대하여 석유 수출 금지 조치를 취하였다. 일본은 당시 미국 석유회사를 통하여 군사용 기름까지 수입하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과 협상을 시작하면서 한편으론 開戰 준비에 들어간다. 특히 開戰에 소극적이었던 해군이 기름 금수 조치 이후 강경론으로 돈다.

 

당시 일본 군부에선 소련을 主敵으로 삼아 北進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과 싸울 것이냐로 논쟁을 하고 있었다. 미국의 斷油 조치는 북진을 포기하고, 석유가 나는 남방(인도네시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남진파의 입지를 강화시켜주었다. 미국은 암호 해독을 통하여 일본의 의도를 간파, 더욱 코너로 몬다. 일본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한다. 헐 국무장관이 제안한 것이라 하여 헐 노트라 불린다. 미국이 인도지나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철군할 것을 요구하자 일본은 개전을 결심, 그해 12월 진주만을 기습하였다  

 

19416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소련으로 쳐들어간 이유 중 하나가 석유 문제였다. 히틀러는 전투 중심의 思考를 하는 군인들과 달리 전쟁 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자원 확보를 매우 重視하였다.

그는 기름이 나오는 루마니아를 소련이 압박하는 것을 보고는 침공을 결심한다. 1941년 겨울 히틀러는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패배했다가 다음해 봄이 오자 主力을 러시아 남쪽의 코카사스 지방의 油田지대로 돌린다. 소련 군수산업의 명맥을 끊어놓겠다는 계산이었다. 이 작전은 스탈린그라드 대회전에서 좌절되어 독일의 패배로 이어진다.


유럽연합은 2012년에 이란의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하여 이란 석유를 수입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하지 못하였다. 미국은 호르무즈 해협을 이란이 봉쇄하면 전쟁행위로 간주, 보복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1973년 10월의 제4차 중동전쟁 때 중동 산유국들이 기름을 무기화하여 제1차 석유파동을 일으켰고, 1979년엔 이란의 호메이니 혁명으로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한국은 제1차 석유파동은 중동진출과 중화학공업건설로 돌파하였지만 두번째 석유파동 때는 국내 정치 문제와 겹쳐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건으로 이어졌다.

 

미국과 중국의 남중국해에서 대결하는 것도 기름과 관련이 있다. 중동에서 원유를 실은 유조선은 호르무즈 해협과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여 한국과 일본 등지로 온다. 이 두 해협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미국 해군의 주 임무이다. 미국은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세계 경제의 생명줄인 통항의 자유에 위협요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원유 공급 중단을 감시하고 강제하기 위하여는 군사력의 전개가 필요해진다. 이 제재는 準 군사 작전이다. 미국은 위험 부담이 큰 군사적 조치를 선택하기 전에 김정은 정권의 작동에 필수적인 원유 및 돈줄 차단부터 하려 들 것이다. 북한이 제국 일본처럼 반응한다면 제2의 진주만 기습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環球時報는 어제 사설에서 중국이 북한에 대하여 기름을 끊으면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없어질 것이고 두 나라 사이에 분쟁이 생겨 사태를 악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中北 분쟁이 일어나면 한국과 미국은 북핵 해결의 책임을 중국에 전가시킬 것이며 이는 중국의 국가이익에 해가 된다는 것이다

금명간 북한은 석유 금수 조치에 대하여 강경한 입장을 천명할 것이다. 석유 차단이 북핵 문제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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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을 돕기 위하여 루스벨트 움직여 美日 開戰 유도'
  
  
   
   ‘눈 공작’(Operation Snow)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 영웅’ 칭호를 받은 적이 있는 러시아의 작가 블라디미르 카르포프는 2000년에 <태평양 전쟁은 피할 수 있었다. (미국의) 對日 최후통첩을 유도한 사람은 스탈린이다>는 요지의 글을 썼다. 그는 <(미국 재부부 高官이자 IMF 창립을 주도했고 그 전에 이미 소련 정보기관에 포섭되었던 간첩) 해리 덱스터 화이트가 (소련 보안기구 NKVD 정보원) 아흐메로프와 파블로프가 설계한 대로 행동하였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소련은 화이트를 조종, 당시 재무장관 모겐소를 통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일본을 자극, 미국을 공격하도록 하는’ 건의서를 쓰게 했다는 것이다.
   소련 정보기관은 화이트의 이름을 빌려 이 작전을 ‘눈 공작’(Operation Snow)라고 불렀다. 소련이 미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을 유도하려 한 것은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하면 소련을 공격할 자원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외교 안보 정책 격월간지 ‘포린 어페어’를 발간하는 미국의 권위 있는 ‘외교협회’의 국제경제담당 국장 벤 스틸이 수년 전에 쓴 ‘브레턴우즈의 전투’라는 책에 카르포프의 글이 인용되었다.
   이 공작의 주인공은 당시 27세이던 소련 공작원 파블로프였다. 1941년 봄에 그는 워싱턴으로 파견되었다. 그의 임무는 (미국 공산당원이자 미국 내 소련 간첩망의 요원이던 휘테카 챔버스를 통하여 꾸준히 정보를 제공해왔던) 화이트를 활용하는 일이었다.
   파블로프는 1996년에 자신의 체험담을 《눈 공작》이란 책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파블로프는 1941년 5월,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모겐소 재무장관이 가장 신임하던 측근이던 화이트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썼다. 그는 중국의 ‘빌’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빌’은 리투아니아 출신의 소련 정보원 조셉 카츠가 그 2년 전 화이트에게 소개해준 ‘중국 전문가’였다.
  
   모겐소 재무장관 통하여 루스벨트에게 영향 끼쳐
  
   파블로프는 화이트와 빌이 만났던 식당 ‘올드 에비트 그릴’에서 접촉하자고 제안하였다. 파블로프는 화이트와 한 약속대로 식탁에 ‘뉴요커’ 잡지를 놓고 기다렸다. 파블로프는 자신이 중국에 다녀오는 길인데, ‘빌이 아시아에서 일본이 벌이는 침략정책에 대한 걱정을 전해달라’고 부탁하더라고 했다. 파블로프는 영어를 잘못 한다고 사과한 뒤 화이트 앞에 빌의 메모를 펴놓았다. 메모를 읽은 화이트는, 빌의 생각이 어쩌면 자신과 그렇게 같은지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메모를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려 했다. 파블로프는 이를 제지, 메모를 돌려받은 뒤 자신은 중국으로 돌아가는데 빌이 화이트의 생각을 알고 싶어 한다고 했다.
   ‘미국은 일본의 위협을 인정하는가. 그렇다면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어떤 행동을 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화이트는 파블로프에게 이렇게 설명하였다.
   ‘빌의 생각은 나의 확신과 일치한다. 빌과 같은 전문가도 나와 같은 생각임을 확인하였으므로 필요한 방향으로 필요한 노력을 할 것이다.’
   화이트는 천천히 이야기했다. 파블로프에게 ‘이해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파블로프는 화이트의 메시지를 단어 하나하나 되뇌었다. 화이트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음식 값을 지불하고 사라졌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화이트는 유대인이었다. 그는 루스벨트 행정부의 실력자이던 모겐소 재무장관의 최측근으로서 국제경제 담당 국장이었는데, 외교문제에 대한 자문도 했다.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에 이어 체코 합병 정책을 추진, 유럽에 戰運(전운)이 드리워지던 1938년 10월 모겐소 장관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의 기초를 화이트에게 지시하였다. 주제는 국제 정세였다. 화이트는 독일, 일본, 이탈리아를 ‘침략자’라고 표현하면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강철 같은 단호함’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썼다. 모겐소 명의의 편지는 10월17일 대통령에게 전달되었고, 11월14일 대통령 주재 백악관 회의가 열렸다. 루스벨트는 히틀러의 압박에 영국과 프랑스가 굴복한 뮌헨 회담을 언급하면서 미국이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미국의 외교적 진로에 지침을 준 중요한 회의였다. 화이트는 자신의 생각이 모겐소 장관을 통하여 대통령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 더욱 적극적으로 외교적 사안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두 스타 간첩
  
   소련 공작원 파블로프와 만난 직후인 1941년 5월 하순에 쓴 화이트의 메모는 모겐소 장관에게 6월6일에 전해졌다. 이 메모에서 화이트는 미국 국무부의 모호한 정책을 비판한 뒤 소련과 일본에 대한 정책 구상을 썼다. 당시 스탈린의 소련은 히틀러의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화이트는 소련에 경제적 이득을 제공, 獨蘇(독소) 유대 관계를 깨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일본 문제에 대하여는 일본군이 점령한 중국과 인도지나에서 철수하면 약간의 정치적 경제적 보상을 해주자는 제안을 했다. 파블로프가 화이트에게 전달한 빌의 메모(‘빌’의 정체는 NKVD 정보관 아흐메로프였다)에는 미국이 일본에 요구해야 할 사안을 세 항목으로 적었다. 중국과 국경지대에 대한 침략 중지, 중국대륙으로부터 철군, 그리고 만주로부터 철군. 화이트는 모겐소 장관에게 건의한 문서에서 빌의 메모에 적힌 두 항목은 반영하였으나 만주에 대하여는 미국이 일본 제국의 일부로 인정해야 한다고 썼다가 수개월 뒤엔 이 입장을 철회한다.
   《브레턴우즈의 전투》를 쓴 스틸은 이 책에서 <만주문제에 대한 화이트의 입장을 보면 그가 카르포프의 주장과는 달리 소련 정보기관의 꼭두각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고 썼다. 아흐메로프(빌)는 화이트의 행동에 대하여 타이밍과 윤곽에 영향을 끼친 정도라는 것이다. 화이트는 누구의 지시를 받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확신에 따라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美日 교섭 과정에 개입하였다는 뜻이다. 스틸은 <어떻든 화이트의 개입은 이 해 가을의 결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했다.
   당시 화이트는 미국 공산당원이 아니었다. 소련 간첩망의 일원도 아니었다. 그는 자진하여 미국 정부의 고급 문서와 정보를 소련에 넘겨주는 간첩질을 한 사람이다. 1930년대 미국에서 활동한 소련 첩보기관은 두 ‘스타’를 가졌는데, 화이트 이외의 한 ‘스타’는 국무부의 엘리트 高官(고관) 엘저 히스였다. 히스는 얄타 회담에 루스벨트 대통령을 수행한 사람이고, 유엔을 창립할 때 사무총장 역할을 하였다. 전향한 휘테커 챔버스 등의 폭로가 없었더라면 히스는 국무장관, 화이트는 IMF 총재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챔버스는 히스와 화이트가 건네주는 기밀문서를 받아 이를 복사, 소련 공작원에게 복사본을 전달하고 원본은 돌려주는 일을 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 《증인》에서 화이트에 관하여 재미 있는 인물평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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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進이냐, 南進이냐?
  
  
   소련 공작원 앞에서 작아진 미국 엘리트
  
   화이트는 미국 공산당원이 아니고 동조자였으므로 행동의 자유가 있었고, 이를 즐겼다고 한다. 챔버스가 화이트를 접선하면서 관찰한 그의 행태는 전적으로 모시고 있는 모겐소 장관의 기분에 달렸다. 모겐소가 기분이 좋으면 화이트도 좋고 모겐소가 나쁘면 화이트도 스트레스에 싸였다. 미국 내의 소련 공작망은 화이트 전담 요원으로 철도은퇴자협회의 연구실장 에이브라함 조지 실버만을 배치하였다. 화이트와 실버만은 심리적으로 서로 의지하는 관계였다. 챔버스는 화이트도 많은 지식인들이 그러하듯이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이였다고 회고하였다. 챔버스가 몇 週 동안 화이트와 연락하지 않다가 만나면 친절하고 협조적이었다. 새로 부임한 미국 내 소련 간첩망의 책임자 바이코프 대령이 조직 점검 차 화이트를 만났는데, 화이트는 러시아에서 온 주요인물과 직접 접촉한 데 감동하는 듯 하였다고 한다. 장관까지의 출세도 보장된 히스나 화이트 같은 미국 정부의 고관이 거친 러시아 공작원 앞에서 작아지는 모습은 한국에서도 비슷하게 再演(재연)되고 있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평양을 찾아가 학살자 김정일을 만났을 때 보여준 굴욕적 言動(언동)은 좌경적 가치관을 가진 인간의 전형적인 행태이다. 많이 배운 한국의 주사파가 불학무식한 북한정권을 추종하는 것도 비슷하다. 미국의 좌파는 소련을, 한국의 좌파는 북한정권을 宗主國(종주국) 정도로 여겼다.
   챔버스는 《증인》에서 히스나 화이트 같은 엘리트들이 소련 간첩질을 자진해서 하는 데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고 의아해하는 것은 공산주의의 본질을 잘 모르는 순진한 의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런 요지로 설명한다.
   <공산주의자들은 계급투쟁설에 입각하여 정부를 평가한다. 자신이 속한 정부라도 공산정권이 아닌 모든 정부는 지배계급의 정치적 수단이므로 모든 수단을 동원, 뒤집어엎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긴다. 그러니 조국을 배신하는 데 대하여 양심의 가책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화이트 같은 공산주의 동조자도 공산당과 협력하기로 결심하는 순간부터 공산주의자처럼 행동한다. 공작에 협조하는 동조자는 공산당원과 같다고 보면 된다. 공산주의자들은 간첩 포섭의 기회가 주어지면 순간적으로 주저하는 경우도 있지만 항상 승낙한다. 조국을 배신한다는 느낌보다는 이를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한다. 간첩질이 위험하므로 더욱 가치 있는 행동으로 여긴다. 인류의 희망과 미래가 걸린 일에 신념의 이름으로 몰입한다는 것, 이미 역사적으로 파산된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양심적 행동이 되는 것이다. 서방 세계는 공산주의자들이 우리와 전혀 다른, 타협이 절대로 불가능한 가치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의 상층부에도 분명 북한에 협조하는 좌익이나 주사파 출신의 고급간첩이 있을 것이다. 이들의 심리와 행태를 분석할 때 챔버스의 上記 글을 참고할 만하다.
  
   “轉向者는 반드시 고발자가 되어야”
  
   챔버스는 《證人》이란 자서전에서 轉向者(전향자)의 고민과 결단을 감동적으로 그렸다. 그는 공산주의의 본질을 드러내는 名言(명언)들도 많이 남겼다.
   <스탈린은 악하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더 악하다. 스탈린은 최고의 파시즘을 구현하였는데 이는 공산주의의 피할 수 없는 결말이었다.>
   <공산주의는 절대악이다. 공산주의자는 轉向(전향)하면 반드시 고발자가 되어야 한다.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하여 전향하는 것이다. 싸우기 싫으면 전향하지 않아야 한다.>
   <전향자는, 살인자들이 배회하고 비명이 들리는데도 정원만 가꾸고 있을 순 없다.>
   <공산당은 본질적으로 테러조직이다. 공산당은 폭력만을 존중한다. 그들은 폭력만 겁낸다. 공산주의는 전쟁을 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공산주의 존재 자체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전쟁의 지속을 의미한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엔 공산주의자가 되는 動機(동기)와 공산주의를 버리는 동기가 다 들어 있다.>
   1938년에 전향을 결심, 미국 공산당 및 소련 간첩망과 결별한 그는 자신이 담당하였던 화이트 등 정보제공자를 찾아간다. 먼저 재무부로 전화를 걸어 화이트를 불러냈다. 화이트는 반기면서 “협조자들을 점검하러 오셨나”라고 물었다. 챔버스는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나는 공산당과 결별했다. 내가 온 것은 당신이 간첩 조직과 헤어지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다. 만약 당신이 결별하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규탄할 것이다.”
   화이트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농담이지요?”라고 중얼거렸다. 챔버스는 화이트가 겁을 먹었으니 조심할 거라고 생각하였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달랐다. 화이트는 다른 간첩 세포의 관리로 넘어가 여전히 정보를 제공하였다.
   1941년 소련 NKVD 공작원이 화이트를 접촉, 美日 교섭에 영향을 끼쳐달라고 부탁하였을 때 그는 소련을 위한 간첩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소련을 조국으로 여겼을 것이다.
  
   스탈린의 불안
  
   스탈린은 계급투쟁적 관점에서 세계정세를 보고 그런 관점에서 전략을 구사하였다. 즉, 자본주의 국가들끼리 싸움을 붙여놓고 안전과 國益(국익)을 도모하는 방식이었다. 1939년 8월 스탈린은 이념적으론 불구대천의 원수인 히틀러의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어 제2차 세계대전의 문을 열었다. 스탈린은 독일의 악몽인 兩面(양면)전쟁의 가능성을 제거해주었다. 소련과 싸울 필요가 없게 된 독일은 폴란드를 무너뜨린 뒤 프랑스와 영국을 칠 것이고, 제국주의 세력이 서로 싸우는 사이 소련은 군비증강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고 스탈린은 계산하였다. 스탈린은 1942년에 가면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히틀러는 1941년을 결전의 해로 잡았다.
   소련도 독일과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兩面전쟁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1941년 4월13일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러일전쟁에서 패전한 帝政(제정) 러시아가 12년 뒤에 무너진 것을 기억하는 스탈린은 일본에 대한 공포감을 가졌다. 일본 육군도 소련을 主敵(주적)으로 삼고 만주에 괴뢰 정권을 세운 뒤 여기에 막강한 關東軍(관동군)을 배치하였다. 소련도 약 50만 명의 병력을 극동에 깔아놓고, 관동군을 견제하고 있었다.
   나치 독일이 1941년 6월22일 소련을 기습 침공하자 스탈린은 일본이 이 기회를 이용, 극동에서 소련의 배후를 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對日(대일)첩보 능력이 결정적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소련군 정보기관 GRU는 독일 기자로 위장한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를 일본에 박아놓고 있었다. 그는 최고급 정보망을 구축하였다. 일본주재 독일 대사를 친구처럼 사귀었고, 고노에 총리의 측근을 포섭하였다. 조르게는 일본주재 독일 무관으로부터 독일의 소련 침공 날짜를 알아내 모스크바에 보고하였으나 스탈린은 이를 묵살하였다.
  
   北進이냐 南進이냐
  
   조르게가 세계사를 바꾸는 데 영향을 끼친 전략 첩보는 1941년 9월14일 보고한 것이다. 그는 일본의 국가지도부로 침투한 정보원(일본인)을 통하여 최고급 정보를 입수, 일본군의 向後 동향을 정확하게 예측하였다.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함락시키기 전까지는 일본군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며, 석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남방으로 향할 것이라고 보고한 것이다.
   스탈린은 이 정보는 무시하지 않았다. 당시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모스크바를 향하여 진격하고 있었다. 외국에선 소련은 이미 끝장났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였다. 開戰(개전) 6개월 사이 200만 명의 소련군이 포로가 되었다.
   일본군 지휘부인 대본영에선 이 기회를 이용하여 宿敵(숙적) 소련을 칠 것인가 동남아로 나갈 것인가, 즉 北進(북진)이냐 南進(남진)이냐의 격론이 벌어졌다. 육군성, 해군, 작전과장은 “이 기회에 북방의 부담을 줄이고 南進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육군의 작전부장은 “다년간의 현안인 북방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北進해야 한다”고 반박하였다.
   대본영 陸海軍部(육해군부)는 獨蘇(독소)전쟁이란 새로운 상황에 대한 지침을 마련, 御殿(어전)회의를 통하여 천황에게 보고하고 재가를 받았다. 만주의 병력을 증강, 사태의 추이를 관찰하면서 남방작전도 준비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대본영은 남방작전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결론에 이르렀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점령작전을 위해서는 인도지나 반도의 남쪽을 확보하고 항공기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당시 인도지나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뒤 일종의 괴뢰로 세운 비시 정부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었다. 비시 정부는 독일의 압력을 받아 일본군의 進駐(진주)를 허용하였다. 1941년 7월 말 일본 제25군이 월남지역에 無血(무혈) 상륙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 영국, 네덜란드는 일본의 資産(자산)동결 및 對日 석유 禁輸(금수)조치를 취하였다. 당시 일본의 석유재고량은 1년분 남짓이었다. 독일을 믿고 달렸던 일본은 벼랑으로 몰렸다. 일본은, 對美(대미) 협상을 통하여 難局(난국)을 타개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전쟁 준비에 들어간다.
   일본 고노에 총리는 미국측에,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지나 이외의 지역으로는 진출하지 않는다, 필리핀의 독립을 존중한다, 미국은 일본과 정상적인 무역관계를 회복시킨다는 3개항을 제의하였다.
   일본은 9월6일 御殿회의를 통하여 “10월까지 우리의 요구조건이 관철되지 않으면 미국, 영국, 네덜란드에 開戰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0월2일 미국은 일본에 회답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중국과 인도지나에서 완전 撤兵(철병), 삼국동맹의 사실상 무효화 요구였다. 대본영은 1941년 10월 말까지 작전계획을 완성하였다. 중국에서 철병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기엔 일본이 너무 나가 있었다. 일본 지도부는 “경제봉쇄를 당하여 미국에 굴복하느니 스스로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는 방향을 선택한 것이다. 難局(난국) 타개의 핵심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油田(유전)지대를 점령, 석유자원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태평양 전쟁은 그 본질이 석유전쟁이었다. 
  
    
   조르게의 정보는 40개 사단 가치?
  
   12월에 들어서면 독일군이 모스크바 근교에 도착, 멀리 크렘린 궁의 첨탑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스탈린이 이때 마지막으로 전선에 투입한 예비병력이 극동에서 불러들인 ‘시베리아 부대’였다. 스탈린은 조르게의 보고를 믿고,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배치하였던 50만 병력 중 40만 명을 빼내 모스크바 전선에 투입, 戰勢(전세)를 역전시켰다. 소련군은 酷寒(혹한)을 활용한 반격작전으로 전환, 독일군을 밀어냈다. 독일군의 常勝(상승) 신화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戰局(전국)의 주도권은 소련으로 넘어갔다. 조르게의 결정적 첩보는 40만 명의 병력만큼 가치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조르게는 1941년 10월17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본은 소련에 잡힌 일본인 간첩과 교환하려 했으나 소련은 조르게(국적은 독일인)가 소련과 무관하다면서 처형되도록 방치하였다. 조르게를 영웅으로 인정한 것은 흐루시초프였다.
   소련 정보기관은 조르게를 통한 對日전략 정보 수집에 주력하던 시기에 美 재무부에 박아놓은 고급 간첩 화이트를 통하여 美日교섭에도 개입, 일본이 미국과 전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려고 했다. 그것이 ‘눈 공작’이다.
  
   開戰이냐, 평화냐
  
   고노에 내각이 美日(미일) 교섭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辭職(사직)하고 일본 陸軍相 (육군상) 도조 히데키 대장이 1941년 10월18일 총리로 임명되었다. 天皇은 도조에게 “9월6일 御前(어전)회의 결정에 구애받지 말고 內外 정세를 재검토하여 신중하게 대처하라”고 지시하였다.
   일본 정부와 대본영은 11월2일 “武力(무력)발동 시기를 12월 상순으로 정하고 마지막 對美(대미)교섭을 시도하며 독일 및 이탈리아와 제휴를 강화한다”고 결정하였다. 그 사흘 뒤 오전 10시 반부터 오후 3시 넘어 까지 진행된 御殿(어전)회의는 육군과 해군의 작전계획을 통과시키고 천황의 재가를 받았다. 이 회의는 또 對美교섭 때 일본이 제시할 甲, 乙 안을 확정했다. 甲案(갑안)은 중국과 인도지나 반도 철군안을 제시한 뒤 조건을 붙여 시기를 늦추자는 내용이고, 乙案(을안)은 갑안을 제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꺼낼 안이었다. 내용은 중국 철군 문제를 일시적으로 동결시키고 美日이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잠정 협정을 맺는 것이었다. 미국이 두 안을 거부하면 개전하기로 했다.
   11월7일부터 주미일본 대사와 코델 헐 국무장관 사이에 교섭이 시작되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외교 電文(전문) 암호를 해독하고 있었다. 헐 장관은 일본의 최종 카드가 乙案(을안)이란 사실을 알았으므로 甲案은 상대하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측 乙案의 對案(대안)으로서 잠정협정안 작성에 나섰다. 일본군이 인도지나에서 부분적으로 철수하면 對日(대일)석유수출 금지 조치를 일부 해제한다는 내용이 들어가는 등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려는 모습이었다. 11월10일 노무라 대사를 만난 루스벨트 대통령도 잠정협정을 맺을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이 국면에서 재무부의 소련 간첩 화이트가 등장한다.
  
   소련 간첩이 작성한 문서가 對日제안의 原型
  
   헐 국무장관이 對日(대일) 제안 내용을 작성하고 있을 때인 11월17일 화이트는 모겐소 재무장관에게 ‘일본과의 긴장을 제거하고, 독일의 패배를 확실히 하는 문제에 대한 접근법’이란 제목의 긴 메모를 전달하였다. 모겐소는 이를 루스벨트 대통령과 헐 장관에게 전달하였다.
   이 메모에서 화이트는 중국으로부터 일본군 철수, 蔣介石 국민당 정권을 제외한 다른 중국 정권에 대한 지원 중단을 일본에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메모는 국무부와 육군성 등이 협의, 對日 제안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기초 문서가 되었다. 헨리 스팀슨 육군 장관은 “너무 과격한 내용이라 일본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화이트는 자신의 강경한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親蘇的(친소적) 인사를 동원, 협조를 요청하는 등 열정적으로 소련의 이익을 위하여 뛰었다.
   헐 장관은 타협적인 잠정 협정안과 강경한 포괄적 해결안 두 개를 준비하였는데, 後者(후자)에 화이트의 주장(즉, 모겐소의 주장)이 거의 반영되었다. 포괄적 해결안을 역사학자들은 ‘헐 노트’라고 부르는데 모겐소案이 그 原型(원형)이라고 본다.
   11월26일 루스벨트는 잠정안을 버리고 강경한 포괄적 해결안, 즉 ‘헐 노트’를 일본에 건네도록 결정한다. 이런 급선회는 중국 상해로부터 들어온 정보 때문이었다. 육군장관 스팀슨은 11월25일 낮 <상해에 대규모 일본군 집결, 30~50척의 수송선에 타고 출항>이란 보고를 받았다. 다음 날 이 정보보고를 받은 루스벨트는 “일본이 철군 교섭을 하면서 원정군을 인도지나에 보내는 것은 배신행위다”고 격노, ‘헐 노트’를 일본 대사에게 수교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날 저녁 헐 노트를 통보 받은 일본 특파 대사는 “일본 정부가 이 제안을 읽으면 교섭을 중단할 것이다”고 반응하였다.
  
   진주만 공격
  
   일본 대표들은 본국으로부터 11월29일까지는 어떤 경우에도 회담을 끝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고, 미국도 암호해독을 통해 알고 있었다. 즉 11월29일 이후엔 일본이 미국을 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단, 진주만 공격은 예상하지 못하였다). 헐 장관은 11월27일 스팀슨 육군장관이 전화를 걸어오자 “나는 이 문제에서 손을 뗐다. 문제는 이제 당신과 녹스(해군장관)의 손으로 넘어갔다”고 말하였다.
   ‘헐 노트’를 읽은 도조 일본 수상은 “이제 남은 길은 어전회의에서 결정한 전쟁밖에 없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도조는 ‘헐 노트’를 최후통첩으로 이해하였다. 27일 일본 대본영의 최고 지도기구인 정부연락회의는 對美교섭의 불성립을 확인하였다. 12월1일 일본은 御前(어전)회의에서 미국, 영국, 네덜란드를 상대로 한 공격을 승인하였다. 다음 날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진주만을 향하여 접근 중이던 항공모함 중심의 기동부대에 12월8일(일본 시간)을 기하여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41년 12월7일 아침 8시(현지 시간) 일본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366대의 전투기는 진주만의 해군기지를 공습, 188대의 미군 전투기를 활주로에서 파괴하고, 네 척의 戰艦(전함)을 격침시키고 다른 네 척의 전함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11척의 다른 군함도 격침되거나 운항 불가능 상태가 되었다. 2330명의 미군이 戰死(전사)하였다. 그중 1177명은 격침된 전함 아리조나 호에 타고 있던 水兵(수병)들이었다.
  
   소련의 색깔이 입혀진 ‘헐 노트’
  
   진주만 공습을 전해들은 영국 수상 처칠은 “이보다 더한 행운이 大英제국을 찾아온 적은 없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나는 침대에 들어서 구제받아 감사하는 자의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고 회고했다. 스탈린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소련 정보기관 NKVD의 미국과장이던 비탈리 파블로프는 “우리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고 한다. 그는 물론 화이트를 만나 빌의 부탁을 전한 그 정보원이었다.
   벤 스틸은 《브레턴우즈의 전투》에서 이렇게 요약하였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결정은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의 연쇄적 축적이 만든 결과였다. 어느 개인이나, 어느 개별적 사건이나, 어느 개별적 행동이 촉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장 근접한 요인은, 파블로프와 그의 가장 중요한 미국 내 접선자 해리 덱스터 화이트 사이에서 생긴 흥미로운 커넥션이었다.>
   《헐 노트를 쓴 남자》란 책을 쓴 교토산업대학의 스도 신지(須藤眞志) 교수는 이렇게 평하였다.
   <모겐소 안을 쓴 화이트는 유대인으로서 강렬한 反파시스트, 親蘇派(친소파)였다. 화이트에게 소련의 공작원이 접근하여 日美교섭에서 일본을 도발하는 제안을 미국이 하도록 했다. 獨蘇戰(독소전)을 전개하던 소련은 미국의 참전을 원했다. 헐 노트는 국무부가 만들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소련의 색깔이 입혀져 있었다.>
   1941년 12월11일 히틀러는 일본 및 이탈리아와 맺은 3국협정에 따라 미국에 선전포고하였다. 독일은 美蘇英(미소영)을 동시에 敵으로 돌리는 전략적 실책을 저질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일이 일으킨 전쟁에 참전, 자유세계를 지키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였으나 미국의 反戰(반전) 여론이 강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지 않고 남방 공략만 하였거나 독일이 對美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더라면 참전을 결단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과 독일의 對美 선전포고는 루스벨트의 고민을 한꺼번에 해결하였다. 거대한 미국의 경제력과 과학기술력이 연합군의 편에 서게 됨으로써 주축국(독일, 일본, 이탈리아)의 패망은 시간문제였다.
   美日 간 태평양 전쟁의 개막으로 가장 큰 得을 본 것은 소련이다. 일본이 소련의 배후를 치는 걱정을 하지 않게 된 것은 물론이고, 자본주의 체제의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원조를 받아 독일군을 몰아내고, 동유럽을 공산화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 일본의 항복이 임박하자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 만주를 침공, 38도선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한반도 분단과 한국의 독립(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 약속)은 진주만 공격과 무관하지 않고, 그런 점에서 소련 간첩 화이트의 역할은 오늘의 한국인들에게도 일정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셈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미국의 참전을 불러 戰後(전후) 미국이 세계를 주도하게 만들었다. 소련의 ‘눈 공작’은 세계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첩보작전이었을 것이다. 가장 효율적인 간첩은 화이트처럼 자신의 소신에 따라 자발적으로 국가 정책을 갖다 바치는 자이다. 한국의 화이트는 누구일까?

언론의 난
[ 2017-09-05, 00:58 ] 조회수 : 5112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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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건     2017-09-05 오후 10:36
희망사랑님 -
좀 신사적으로 말씀하면 하네요.
조갑제를 놓고 함부로 쫘빨 프락치야?!
   희망사랑     2017-09-05 오후 8:18
그럼 원유차단을 하지말라는 얘기야? 이 요망스런 좌발 프락치야,가장 대표적인 보수논객인척 평소에는 위장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좌발앞잡이가 되어온 대표님이 무슨 염체가 있어 이따위 공갈을 치는가?
   이중건     2017-09-05 오전 9:52
북한은 도발을 할 지언정 전쟁은 못합니다.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는 수령 하나 살기위한 것이지요.
   멋진나라     2017-09-05 오전 9:33
중.북 분쟁은 절대 안되고, 한.미 분쟁은 끊임없이 유발하고.
이런 중국을 믿고 생명을 안보리에 어쩌구저쩌구 구걸하는 것이, 이게 나라입니까? 살찐 돼지의 최후는 도살장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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