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 의원의 국회 5·18 관련 세미나로 또다시 5·18과 관련된 논쟁을 보면서 퇴역 군인으로 한 말씀 드립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우리 현대사에서 6·25 전쟁 다음으로 가장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6·25를 직접 겪은 세대는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5·18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 당시를 경험한 이들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비록 법의 이름으로 '5·18 민주화운동'이라 규정되었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며 사회적 갈등(葛藤) 또한 여전히 심화(深化)되고 있습니다.
5·18이 일어났을 때 저는 사관생도 3학년이었습니다. 어느덧 67세가 된 지금도, 제 가슴속에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몇 가지 궁금증이 남아있습니다. 사건 두 달 후 광주 상무대에서 한 달간 유격훈련을 받았고, 1982년 소위 임관 후 대부분의 군 생활을 특전사에서 보냈습니다. 나름대로 5·18의 진실을 알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여전히 가슴에 남은 물음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당시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외치던 인물 중 직접 5·18에 참여하여 사망하신 분이 있는지, 그리고 사망한 분들의 평소 민주화에 대한 열망(熱望)과 소신(所信)은 어떠했기에 목숨까지 걸었던 것인지.
둘째, 당시 시민들의 요구사항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순수한 군사독재 저항(抵抗)이었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선동에 의한 권력투쟁 과정은 아니었는지.
셋째, 사건 15년 후 ‘역사 바로세우기’ 법정에서 규정된 5·18 민주화운동이 권력의 정치적 목적과 무관하게 합의된 결과였는지.
넷째, 현재의 좌파 정치권력과 5·18 민주화운동은 어떤 관련이 있으며, 그들은 무엇을 기여했는지, 그들 중에 유공자로 지정된 사람은 누구인지.
여전히 이 질문들에 명확한 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랜 특전사 복무를 통해 확실히 느낀 점이 하나 있습니다. 영화나 문학작품에 그려진 것처럼 특전사 군인에 의한 일방적인 시민 학살(虐殺)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현장에 있었던 부사관들을 보며 느낀 점은 그들 역시 피해자였다는 것입니다. 군인과 시민군 쌍방이 서로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던 비극이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수많은 분이 희생되었기에, 현장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저를 포함해 대부분의 군인들은 오랜 세월 부채(負債)감과 죄(罪)의식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국민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살아온 세월이었습니다.
이제는 군인들도 5·18이라는 굴레와 비난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어야 합니다. 5·18은 대한민국이 근대화(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발생한 참담(慘憺)하고 비극적인 역사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궁금증에 대한 답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나간 과거를 교훈으로 삼아,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더 이상 5·18을 이용해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세력에 흔들리지 않는, 현명한 국민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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