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의 再侵(재침)을 우려했던 기벌포 전투 후의 30년
문무대왕이 간다(15) 對 토번 전쟁이 호전되면 언제든 한반도를 다시 침략하겠다는 무측천의 의지

정순태(작가)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기벌포 해전 패배 후 당군은 더 이상 한반도에 침입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평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對 토번 전쟁이 호전되면 언제든 한반도를 다시 침략하겠다는 것이 무측천의 의지였다.

무측천은 병약한 남편 고종 李治(이치)를 로봇化해 놓고 당나라의 국정을 완전 장악했고, 683년 당고종의 사후(死後)에는 자기 소생의 두 아들을 황제로 올렸다가 차례로 퇴위시킨 다음, 690년 당조(唐朝)를 찬탈하여 주(周)를 창업해 중국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女황제가 되었다. 신라로서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긴장의 시대가 이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676년, 당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요동성에서 북쪽으로 더 후퇴시켜 신성(新城: 심양의 북쪽 무순 부근)으로 옮겼다. 677년 2월에는 고구려의 마지막왕인 보장왕 고장(高藏)을 요동도독으로 임명한 뒤에 조선왕으로 책봉했다. 중국의 오지로 사민(徙民)되었던 고구려 유민 2만8천 여 호(戶)도 요동지방으로 재(再)이주시켰다.

또 백제 옛땅에서 철수한 웅진도독부를 요동반도의 건안성(建安城: 지금의 요녕성 營口市)에 설치하고, 당의 司農卿(사농경)으로 있던 夫餘隆(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의 아들)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고, 이어 대방왕(帶方王)으로 책봉했다. 중국의 전통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정책이었다. 요동도독 고장이나 웅진도독 부여융은 모두 안동도호(安東都護)의 절제(節制)를 받아야 하는 괴뢰였다.

그러나 고장은 말갈족과 짜고 反唐(반당) 투쟁을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공주(邛州 지금의 사천성)로 유배되었다. 요동에 再이주되었던 고구려 유민 2만8000호도 또다시 감숙성과 하북성의 오지로 분산 이주당했다. 대방왕 부여융은 문무대왕이 겁나, 감히 백제 고토로 들어오지도 못했다.

문무왕 18년(678), 신라는 선부(船府)를 설치해 종래 兵部(병부)의 대감(大監)과 제감(弟監) 등이 관장하던 水軍 업무를 전담시켰다. 대감은 나마(관등 제11위)로부터 아찬(관등 제6위)까지가 맡은 직책이었다.

선부의 장관인 선부령(船府令)은 수군․ 해운․ 조선(造船)을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선부의 설치는 신라의 수군 발전을 위한 획기적 조치였다. 신라가 삼국통일로 이전보다 3배나 되는 영토를 장악하게 되고, 국토의 3면에 바다로 둘러싸인 해양국이 되었던 것이다.

[ 2016-10-10, 17: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