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남침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6·25전쟁의 현장》(끝) / 치열한 高地 쟁탈전: 열두 차례나 주인이 바뀐 ‘白馬高地 전투’

鄭淳台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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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독재자는 핵무기로 남한을 위협하면서 남한의 從北(종북)들과 연합해 또다시 남침을 시도할 것이다. 미국의 영토를 향한 대륙간탄도탄이 발사준비단계에 있는 상황에서도 과연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즉각 작동할 것인가? 그것은 이제 누구도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이제, 우리가 自衛的(자위적) 핵무기를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안보 위기상황은 북한의 反민족적 독재정권이 존속하는 한 지속될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은 웰빙이나 권력의 配分(배분) 문제를 놓고 曰可曰否(왈가왈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밴플리트의 德談: “한국군이 미군보다 더 잘 싸웁니다”

 군단포병을 위시한 공병·병기 등 제반 지원 능력을 갖춰 諸兵(제병)협동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국군 최초의 軍團(군단)이 탄생했다. 특히 제2군단의 155mm砲 대대는 이때 처음 實戰(실전)에 배치되었다
 지리산 토벌이 끝난 직후인 1952년 4월, 金城(금성) 정면의 미 제9군단과 재건된 국군 제2군단(수도·제3·제6사단)이 교대했다. 제2군단이 재건되기 직전까지 국군은 10개 사단으로 늘어나 있었지만, 군단은 동해안의 제1군단(李亨根 소장)뿐이었다. 그래서 白야전전투사령부를 기간으로 1950년 북진 시 붕괴되었던 제2군단의 재건이 시도되었다.
 제2군단의 재건에 앞서 白善燁 장군이 군단장직 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것은 군단 직할의 砲兵(포병), 工兵(공병), 兵器(병기) 부대 등의 창설이었다. 그는 제1군단장 재직 시 아무런 지원수단을 갖지 못하면서도 예하 사단에 명령만 내려야 했던 당시의 고충을 호소, “군단 직할 지원부대가 창설되지 않는 한 군단의 재건이 무의미하다”고 직언했던 것이다.
 미 8군은 우여곡절 끝에 미 제5포병群(155mm포 3개 대대, 105mm포 1개 대대)을 常時(상시) 지원하도록 하고, 또 각 사단의 포병은 이때까지의 1∼2개 대대를 4개 대대로 확충했다. 특히 국군의 155mm 대대는 이때 실전에 처음 배치됐고, 盧載鉉 대령(훗날 대장·국방부 장관 역임)이 첫 포병지휘관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다. 동해안의 제1군단이 포병부대 없이 휴전을 맞은 것에 비하면 제2군단의 포병력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런 조치는 백선엽 장군뿐만 아니라 당시 포병감 申應均(신응균) 소장의 노력에 힘입은 바 컸다. 신응균(훗날 국방차관·국방과학연구소장 역임)은 일본육사 53기 砲兵科(포병과) 출신으로 오키나와 전투 때 일본군 제24사단 포병대대장(少佐)으로 참전, 패전 후에는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進明女高(진명여고) 수학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신응균 장군은, 일본육사 26기 출신으로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申泰英(신태영) 중장의 장남이다.   
 국군 제2군단은 포병의 증강뿐 아니었다. 4개 대대로 이뤄진 工兵團(공병단) 및 兵器團(병기단)이 창설되어 군단으로서의 기능을 강화시켰다. 또 사령부 요원은 春川(춘천)의 미 제9군단 사령부에서 3주간 훈련을 받았다. 이 훈련은 이후 상당기간에, 국군의 군단을 신설하는 경우 필수 코스가 되었다.
 제2군단 사령부의 위치는 金城(금성)지구라 불리던 華川郡 上西面의 小土古味里(소토고미리·일명 소토골)이라는 긴 이름의 마을. 제2군단은 1952년 4월5일에 지휘권을 발동했는데, 그 진용은 ▲군단장 白善燁 중장 ▲부군단장 元容德 준장 ▲참모장 李炯錫 준장 ▲參謀副長  金點坤 대령 ▲작전부장 朴珍錫 대령이었다.
  부군단장 원용덕 장군은 세브란스의전을 나온 만주군 군의관 출신이었는데, 군영 졸업 후 전투지휘관으로 변신한 특이한 경력의 인물로서 군사 지식과 영어 실력이 뛰어났다. 이형석 장군은 일본 육사의 입학시험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 합격한 인물이다. 원용덕·이형석 준장은 국군 최초의 중장인 백선엽 군단장보다 모두 10년 年上(연상)이었다.
 제2군단은 미 제9군단에 배속돼 있던 제3사단(사단장 白南權 준장)과 제6사단(사단장 白仁燁  준장) 및 지리산 공비토벌을 마친 수도사단(사단장 송요찬)을 예하에 두었다. 제6사단장에 백선엽 군단장의 친동생 白仁燁(백인엽) 준장이 전보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제6사단은 金城(금성) 돌출부의 미 제40사단과 교체되어 제2군단의 左翼(좌익)을 담당했다. 우익에는 제3사단, 중앙에는 수도사단이 배치되었다.

 여기서 미군 고위 장성의 모럴(moral·도덕성)을 과시한 실례 한 가지를 거론해야 할 것 같다. 밴플리트 사령관은 전날 밤 아들이 행방불명됐다는 悲報(비보)를 듣고도 1952년 5월4일의 국군 제2군단 창설식에 참석해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하게 행동했다. 전폭기 조종사로 참전한 중위 밴플리트 2세는 전날 밤 B26기를 몰고 群山(군산)비행장을 발진, 북한 지역에 야간 폭격차 출격한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미군이 국군 제2군단의 창설을 도와 중부 전선을 담당하게 한 것은, 전차와 차량의 기동력을 주축으로 하는 미군에게는 지형이 험준한 이곳이 그들의 전투력을 발휘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대 교대의 직후에는 적이 威力偵察(위력정찰)을 시도하는 것은 戰場(전장)의 상식. 단순한 교대인가, 공세를 위한 集中(집중)인가, 후퇴를 위한 欺瞞(기만)인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중공군의 위력정찰은 으레 교대했던 날의 저녁 또는 다음날에 감행되었다.
 백인엽 사단장은 정면의 중공군 제36사단은 반드시 위력정찰을 시도할 것으로 보고, 교대했던 그 날부터 사단의 全화력은 물론 군단 포병의 증원을 얻어 공격을 기다렸다. 특히 사단의 主저항선은 金城盆地(금성분지)를 눈 아래로 내려보는 高地 위에 있었기 때문에 적은 야습을 하거나 비 오는 날을 골라 공격할 것으로 판단, 일부 병력을 陣前(진전)에 매복시켰다.
 예측대로 1952년 4월6일 밤에 중공군의 1개 대대가 가만히 다가왔다. 산꼭대기의 진지를 목표로 삼은 듯 縱隊(종대), 그대로였다. 드디어 맹렬한 지원사격이 시작되자, 적은 횡렬의 돌격대형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은 陣前(진전)에 나가 있던 척후로부터 자세한 보고가 들어왔다. 적의 밀집부대에 대해 모든 화력이 집중되었다. 이어 반격부대로 지정된 병력이 적의 側背(측배)로부터 기습을 가했다.
 중공군의 위력정찰 부대는 격퇴되었고, 포로 22명을 잡은 이외에 박격포를 포함한 다수의 무기를 노획했다. 큰 전투가 없었던 그 시점에서는 대단한 戰果(전과)였다. 
 다음날인 4월7일,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再建 제2군단의 전선을 시찰했다. 대통령으로서는 국군 군단이 전선 중앙의 突出部(돌출부)를 지킬 것인가, 어떤가에 그의 정치적 발언력이 걸린 문제였던 만큼 격려를 겸해 실정을 살피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 李 대통령을 수행한 밴플리트 8군사령관은 “한국병사가 미국병사보다 더 잘 싸웁니다”라는 德談(덕담)을 해 老대통령을 기쁘게 했다.

“병사 희생을 1인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포탄은 얼마든지 보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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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더미처럼 쌓인 탄피들이 대규모 화력전을 말해주고 있다


 
 드디어 1952년 5월이 되자, 제2군단 정면에 敵(적) 공세의 조짐이 나타났다. 여러 정보를 종합하면, 후방에 배치되어 있던 중공군 2∼3개 군단이 전진, 그 공세가 하루 이틀 안에 시작되려는 듯 보였다.
 제2군단은 비상경계를 발하고 기다렸는데, 백선엽 군단장에게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한다. 山地(산지)의 戰場(전장)인 만큼 공격부대도 보급품도 골짜기 및 강줄기 옆 도로에 모여 있고, 그 밀도는 매우 높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따라서 그 집결지를 포격하면 상당한 타격을 줄 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공격준비 破碎射擊(파쇄사격)―신중한 성격의 미 제5砲兵群長(포병군장) 메이요 대령도 이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대량의 탄약이 필요했기 때문에 미 8군의 승인이 필요했다. 그때 밴플리트 8군사령관은 미 의회에서 ‘밴플리트 彈藥量(탄약량)’이라며 비판을 받고 있었다. 이에 백선엽 군단장은 밴프리트 사령관에게 破碎射擊(파쇄사격)의 可否(가부)에 대해 질문했다. 답변은 명쾌했다.

“그 쪽이 값 싸다. 방어에서도 先制(선제)가 필요하다. 포탄은 얼마든지 보급한다. 철저하게 포격하라. 필요하면 공군도 8군 포병도 그쪽으로 돌리겠다!”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는 陣地(진지)방어에 의해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포병에 의한 집중사격으로서 적을 분쇄하려고 결심했다. 이 때문에 사용된 대량의 포탄은 ‘밴플리트 彈藥量(탄약량)’이라 불렸다.
 그 무렵, 중공군의 攻勢(공세) 움직임을 발견하면, 밴플리트는 대량의 공격준비 破碎射擊(파쇄사격)을 감행해 아군의 병력 손실을 가능한 한 줄였다. 이에 대해 미국의 매스컴은 “탄약의 낭비”라고 비난했지만, 밴플리트는 “원래, 전쟁만큼 귀한 人命(인명)을 헛되이 죽이는 건 없으므로 그만큼 탄약을 사용해 1인의 사상자라도 줄이면 값싼 것”이라고 응수했다.  
 ‘오늘 밤’부터 공세가 시작된다고 판단되던 5월 어느 날의 오후, 군단과 지원의 砲兵群(포병군)은, 제5砲兵群長의 통제 하에 돌연 破碎(파쇄)사격을 실시했다. 눈으로 볼 수 있었던 목표는 물론, 集結地(집결지) 및 물자의 集積地(집적지)로 보여지는 마을 및 산림에 용서 없이 집중포격이 가해지고, 射程內(사정내) 부락은 黃燐彈(황린탄) 사격으로 불태웠다.
 또 射程外(사정외)의 목표에는 유엔 공군이 波狀(파상) 폭격을 가하고, 포병이 포격하지 않은 死角(사각)지대에는 네이팜彈(탄)을 투하했다. 130門의 대포와 수천 門의 박격포가 방어정면 20km에 대해 약 12시간에 걸쳐 포격을 실시했다. 일찍이 볼 수 없었던 大砲擊(대포격)이었다. 이 破碎(파쇄)사격에서 포탄 3만 발을 발사했다. 1門 당 300발이나 쏜 꼴이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敵襲(적습)은 커녕 전날 밤까지 뻔질나게 잠입하던 척후조차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白善燁(백선엽) 군단장은 “적의 陽動(양동)작전에 넘어가 귀중한 資材(자재)를 낭비했던 것은 아닐까”라고 자책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러 正面(정면)에서 위력정찰의 결과, 파쇄사격의 효과가 컸다는 보고가 잇달아 들어왔다. 중공군의 제1선은 흩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척후는 적의 공격준비 위치라고 생각되는 구역을 정찰할 수 있었는데, 중공군 병사의 遺體(유체)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불탄 보급품 및 파괴된 대포와 박격포의 잔해도 파쇄사격의 효과를 말해주고 있었다. 사로잡힌 많은 포로들은 異口同聲(이구동성)으로 “야습 개시일의 오후에 일찍이 상상도 못했던 포격을 받고 큰 손해를 입어 공세는 불가능하게 되었다”며 그때의 공포를 털어놓았다.
 결과적으로 理想(이상)에 가까운 공격준비 破碎(파쇄)사격을 실시한 것이었다. 파쇄사격을 실시한 戰史(전사)는 그렇게 많지 않다. 스탈린그라드 및 레닌그라드 會戰(회전)에서 소련군의 파쇄사격이 독일군의 공세를 막았던 하나의 요인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국군 제2군단 정면에서처럼 중공군의 공격의지조차 破碎(파쇄)한 사례는 희귀한 것이었다.
 밴플리트 사령관은 그 후 모 장성으로부터 “金城(금성) 정면의 포격은 쓸데없는 낭비가 아니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원래 전쟁이란 그 자체가 쓸데없는 것이고, 인간의 바보스런 행위인 것이다. 人命(인명)은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는 것, 서로 죽이는 전쟁이란 바보 짓의 極致(극치)가 아닌가?”

철도·교량 등 敵의 보급 루트 파괴
    

 공산군은 1951년 겨울부터 병력을 늘려, 1952년 봄에는 86만7000명(중공군 64만2000명+ 북한군 22만5000명)에 달해 국군+유엔군의 60만 명을 능가했다. 병력의 차이는 갈수록 현격해졌다.
 그런 추세에서 유엔군이 가장 큰 위협이라고 느낀 것은 중공 공군기의 증가세였다. 1951년 7월에는 500機(기) 정도였지만, 1952년 4월에는 1200기 이상으로 증가했고, 그 중 800여기는 소련제 제트기였다. 중공 공군이 적극적으로 도전해 오지는 않았지만, 유엔군에 대해서는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
 유엔 공군은 정치적 제한에 의해 韓滿(한만)국경을 넘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중공 공군은 소련의 원조로 매월 증강되었다. 이와 함께 急(급)피치로 북한 내 비행장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비행장은 유엔 공군기의 파괴와 북한군에 의한 수리의 경쟁이었다. 유엔 공군기는 항공저지작전으로서 주요 철도·교량 등 보급 루트를 철저하게 때렸다.
 겨울철은, 압록강의 凍結(동결)로 어디서든 渡河(도하)가 가능했기 때문에 압록강의 다리에 대한 공격은 1952년 4월에 실시되었다. 국경 침범 방지를 위해 폭격은 目視(목시)폭격이 가능한 경우만으로 限定(한정)하고, 이를 가설한 日本 기술자로부터 설계도를 구해 다리의 약점을 노렸다.
 다리는 목표의 60개 중 48개를 사용 불능으로 만들었다. ‘Mig 回廊(회랑)’에서는 Mig와 F86의 공중전이 증가했다. 그러나 공산군 측은 항공공격에 의해 유엔군의 보급을 저지하는 능력은 없었다. 이 때문에 유엔군 보급물자는 前線(전선)의 바로 뒤에서 野積(야적)되어 防共(방공)을 위한 전력을 충당할 필요도 없었다.      
 지상전에서 막히게 되면 휴전교섭의 촉진을 위해 공군력이 힘을 쓰게 된다. 그러나 중공군과 북한군의 진지가 地下(지하)로 숨으면서, 진지 파괴의 효과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에 유엔군은 철도 등 적군의 보급선에 대해 집중적으로 폭격을 가했다. 

 그러나 적군은 고사포에 의해 철도를 엄호하고, 터널 안으로 열차를 피난시켜서 흙 포대로 입구를 막고, 인해전술에 의해 파괴된 시설을 응급복구를 해서 兵站線(병참선)을 유지하려 했다. 이 때문에 유엔군의 공중폭격도 절대적 저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또 미 해군 함정은 함포사격에 의해 동해안의 철도 파괴, 항만의 포격, 한국군 제1군단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지만, 이것도 휴전교섭의 꽉 막힌 상태를 타개하는 힘이 되지 못했다.
 유엔군은 지상에서도 하늘에서도 바다에서도 결정적인 힘을 잃고, 완전히 꽉 막힌 상태에 빠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중공군과 북한군에도 전세를 반전시킬 힘이 없었다. 그 사이, 유엔군 측에 대해 특필해야 할 것은 장기전에 대비해 군의 정비를 시행했던 일이다.
 유엔군의 제1선 부대는 수개월의 근무 후 후방에서  몇 주간을 휴양시키고, 또다시 제1선에 돌아온다고 하는 근무 로테이션制를 확립했다. 장병에 대해서도 1개월 근무는 前線이 4점, 후방이 2점으로 정하고, 36점이 되면 귀국시키는 시스템을 채용했다. 이것에는 희생의 부담을 평등하게 함과 함께 많은 장병에게 實戰(실전)을 경험시킨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또 국군에서는 사단마다 9주간의 교육훈련을 실시한 후, 제1선 부대와 교대시킨다고 하는 교육훈련 시스템을 확립했고, 4년제 육군사관학교 및 지휘막료대학의 창설, 훈련센터의 설치, 장교·하사관의 미국 유학 등에 의한 한국군의 질적 향상을 도모했다.
특히 육군사관학교 창설은 이승만 대통령과 밴플리트 8군사령관의 ‘합작품’으로 평가된다.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민병돈 장군은 “剛毅朴訥(강의박눌·강직하고 질박하고 어눌한 성격)한 성격의 밴플리트 장군은 평소 이승만 대통령을 아버지처럼 모셨는데, 下野(하야) 후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별세한 이승만 前 대통령의 시신을 한국에 운구하는 일도 힘껏 도왔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제2전선, 거제도포로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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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포로수용소의 모습(1952. 5.7)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미국의 국제적 위신을 깎고,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공산군 포로들의 폭동이 잇달아 일어났다. 군사회담은 1951년 11월27일에 제2 議題(의제)인 군사경계선 문제가 타결된 후에도 제3의제(停戰과 休戰의 實行)와 제4의제(포로송환문제)로 분규가 계속되었다. 이들 의제의 논란이 명백해지자, 1952년 2월 공산 측은 돌연 ‘미국의 細菌戰(세균전)’이라는 黑色宣傳(흑색선전)을 들고 나와 유엔 측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1952년 2월18일, 巨濟島(거제도)의 유엔군포로수용소에서 공산주의자(포로)에게 점거된 구획에의 강제 돌입을 둘러싸고 쌍방에 사상자가 발생했다, 급기야 1952년 5월7일에는 포로수용소의 소장이 포로들에게 감금되는 前代未聞(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졌다. 더욱이 포로수용소장의 석방을 위해 포로의 억지 주장을 인정하는 문서가 포로 측에게 交付(교부)되어, 그것이 공산 측의 선동·선전 자료가 되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진 거제도의 현장 답사가 필요할 것 같다.

 2015년 2월27일, 필자는 고성군 東海面(동해면) → 통영시 龍南面 長坪里(용남면 장평리) 해변을 답사한 데 이어 거제도로 출발했다. 장평리는 1950년 8월 한국해병대의 金聖恩(김성은: 당시 중령, 훗날 국방부장관 역임) 부대가 거제도로 침입하려고 통영을 점령한 북한군 제12사단의 先遣隊(선견대)를 제압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강행한 해안이다. 거제도는 포로수용소 소재지였을 뿐만 아니라 그 北岸(북안)에서는 對岸(대안)인 馬山港(마산항)과 鎭海港(진해항)에 대한 포격이 가능한 군사적 요충이다.
 新거제대교는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를 있는 길이 940m 폭 20m의 連陸橋(연육교)이다. 閑山島(한산도) 해전의 초기 현장인 見乃梁(견내량) 해협을 가로질러 놓였는데, 포항 → 마산 → 고성 → 통영 → 거제를 연결하는 14번 국도가 지나가는 다리다. 
 필자는 걸어서 길이 940m의 新거제대교를 건너갔다. 답사 차량은 필자보다 먼저 거제도 쪽으로 건너가 대기하고 있었다. 院坪里(원평리)에서 新(신)거제대교에 올라가 西向(서향)하면 1971년 준공된 거제대교(길이 740m 폭10m)가 보인다.
거제대교와 新거제대교 사이의 해역이 1592년 7월8일의 閑山島(한산도)해전 직전에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지휘한 일본 함대 73척이 출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見乃梁(견내량)이다. 李舜臣(이순신) 장군은 일본 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하기 위해 먼저 戰船(전선) 5∼6척을 견내량에 보내 일본 함대를 향해 선공을 가하다가 반격을 받자, 짐짓 약세를 보이며 퇴각했다. 이에 일본 함대는 일제히 돛을 펴고 추격에 나섰다가 閑山島(한산도) 앞바다에서 포진한 李舜臣(이순신) 함대에게 궤멸적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것이 임진왜란 중 최대 승첩인 한산도해전이었다.

 早春(조춘)의 견내량 바다 위에 놓인 新거제대교에 올랐다. 바람은 조금 거칠었지만, 역시 남쪽 바다라 춥지는 않았다. 1980년대에 大宇(대우)조선소와 三星(삼성)중공업 등 대형 조선소가 거제도에 속속 들어서자, 1971년 4월에 준공된 거제대교로는 거제도의 물동량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이에 1999년 4월 新거제대교가 준공·개통되고, 2010년 12월에는 부산시 가덕도와 거제도의 북부권인 長木面(장목면)을 연결하는 巨加大橋(거가대교)도 준공·개통되어 거제도의 關門(관문) 교량이 3개로 늘어났다.
 유엔군은 전쟁 중에 늘어난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1951년 1월부터 거제도 古縣(고현)-수월 지구를 중심으로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 기록에 따르면 여기에 인민군 포로 15만 명, 중공군 포로 2만 명 등 최대 17만3000명의 포로를 수용했다. 이 중에는 300여 명의 여자 포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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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포로들이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1951년 雙十節(10월10일)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포로수용소 內에서는 反共派(반공파)와 親共派(친공파)의 대립이 치열했다. 1951년 7월10일에 휴전회담이 개시되자, 유혈의 慘事(참사)가 잇달아 일어났다. 특히 포로에 대해 歸還(귀환) 의사를 묻는 심사가 시작되자, 소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심지어는 경비병과 親共(친공) 포로가 전투를 벌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거제포로수용소는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곧 폐쇄되었지만, 이곳에 오면 후방을 교란하려는 적의 제2戰線(전선)이 무엇이며, 공산주의자와의 협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느끼게 된다.
 거제도는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섬의 서부권인 견내량에서 중부권인 古縣洞(고현동) 포로수용소까지는 18km의 거리다. 14번 국도를 달려 長坪洞(장평동)에 이르렀다. 統營(통영) 상륙작전의 현장인 長坪洞과 漢字(한자)까지 똑같다.
 거제도의 장평동 해안에는 三星조선소가 들어서 있다. 거기서 언덕 하나 넘으면 玉浦灣(옥포만). 옥포만은 임진왜란 중 최초의 승첩을 거둔 玉浦海戰(옥포해전)의 현장이며, 1980년 이후 이곳에는 大宇조선이 자리잡고 있다.
 1592년 5월7일, 이순신 함대는 옥포만에서 일부 병력을 상륙시켜 노략질을 하게 하던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의 함대를 先制(선제) 공격해, 大船(대선) 13척, 中船 6척 등 26척을 격파했다. 이순신 함대가 왜적 함대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되는 중요한 一戰(일전)이었으며, 또한 임진왜란에서 조선군이 거둔 최초의 승전이었다.
 古縣(고현) 시외버스터미널 앞 3거리에서 우회전하면 鷄龍山(계룡산) 기슭에 古縣城(고현성)과 거제시 청사, 곧이어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최근, 해운·造船(조선) 경기가 급락하기 전까지는 대한민국에서 소득이 가장 높았던 지역이다. 한국 전체의 1인당 연간 소득이 2만 달러를 넘지 못하던 4∼5년 전에 이미 거제시는 蔚山市 東區(울산시 동구)와 함께 소득 4만 달러를 웃돌았던 富者(부자) 동네였다.

휴전회담의 최대 쟁점: 포로 처리문제

 1951년 7월10일에 처음 개최된 휴전회담은 그해가 저물려고 해도 군사경계선의 문제만 “兩軍(양군)의 現 접촉선으로 한다”는 데 합의했을 뿐, 전쟁포로의 처리문제 등에서는 거듭 난항을 겪고 있었다.
 1949년 제네바조약 제18조에 의하면 포로는 실제의 敵對(적대) 행위가 종료된 후 지체 없이  송환하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포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이것이 최대 쟁점이었다. 제네바 조약에는 이런 본국 귀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을 구제할 조항이 없었다. 예컨대, 作戰(작전) 실패 등의 책임과 관련해 問責(문책)을 우려하는 포로나 공산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포로는 본국송환을 기피할 터이지만, 이런 자에 대한 인도적 救濟(구제) 조항이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한국전쟁은 보다 복잡한 문제로 엮여 있었다. 북한군은 南韓(남한)의 점령지에서 18세 이상의 남한 청년 19만 명을 강제로 입대시켜 낙동강 전선 등에 총알받이로 투입하는 만행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남한에서 30만 명의 노무자를 강제로 징발해 그들의 릴레이式 보급품 수송 등에 투입했던 만큼 당연히 포로 중에는 北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자들이 많았다. 중공군 포로 중에도 國府軍(국부군) 출신자가 많아, 그들 중에서도 중국 本土(본토)보다 臺灣(대만)에의 송환을 희망하는 자가 더 많았다.

 포로처리는 최대의 난제로 떠올라 포로문제소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유엔군 측 대표는 리비 해군소장과 히크만 육군대령, 공산 측 대표는 李相朝(이상조) 소장과 중공군 대좌인 蔡淸文(채청문)이었다.
 해방 직후 소련으로부터 입북한 이상조는 부산의 東萊(동래)고등학교 졸업생으로서 6·25 남침전쟁 후에 駐모스크바 북한 대사를 역임했는데, 金日成(김일성)에 의해 소련파로 몰리자, 숙청당할 것을 겁내 소련으로 망명했다. 그는 1989년 9월에 한국을 방문해 고향 부산을 찾기도 했는데, 러시아로 돌아가 벨로루시의 州都(주도)인 민스크에서 거주하다가 1996년 病死(병사)했다.   
 1993년, 이상조의 서울 방문 때, 필자는 그를 만나 인터뷰했다. 휴전회담이 처음 개최되었을 때 북한 대표들은 “제국주의자의 走狗(주구)는 상갓집의 개만도 못하다”라고 색연필로 쓴 쪽지를 내밀며 白善燁(백선엽) 한국군 대표를 자극하려 했다. 小위원회에서 공산 측은 포로명부 교환에 응하지 않으면서 강제적 전체 교환만을 주장했다.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貴官(귀관)은 비누와 더운 물도 준비해 놓지 않고 빨리 목욕하자고 재촉하고 있다”고 리비 少將이 이렇게 빗대면 이상조는, “비누도 더운 물도 준비되어 있다. 귀관이 浴槽(욕조)에 들어오려 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포로를 조속히 석방하는 것인 만큼 名簿(명부)의 교환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고 맞받았다.
 공산 측이 명부 교환에 응한 것은 1951년 12월18일이었다. 유엔군 측은 인도받은 명부를 보고 啞然失色(아연실색)했다. 포로명부에는 1만1559명만 기재되어 있었다. 한국군 장병이 7142 명, 유엔군 장병이 4417 명이었다. 국군·유엔군 측의 행방불명자가 약 10만 명. 그 중 90%가 포로로 추정되고 있었던 만큼 턱없이 적은 숫자였다. 

 한편 유엔군이 제출한 포로 명부에는 13만2474명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포로 숫자가 대충 12대 1의 차이였다. 공산 측이 제시한 포로의 숫자가 적었던 것은 북한군이 포로로 잡은 한국군 장병들을 무리하게 북한군으로 편입시켰기 때문이다.
“우선, 그런 한국 장병을 포로의 신분으로 되돌려야 한다”
 유엔군 측이 이렇게 요구해도 공산 측의 억지 주장은 搖之不動(요지부동)이었다.
“그 자들은 自願(지원)해서 북조선군에 입대한 것이다”
 공산 측은 포로가 된 한국 병사들을 북한군에 편입시킨 사실을 인정했지만, 포로의 신분으로 되돌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휴전협상 타결을 서둘렀던 유엔군 측은 이 문제에 깊이 개입하지 않고 대충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이에 백선엽 장군에 이어 국군의 회담대표가 되었던 李亨根(이형근) 소장은 같은 편인 유엔군 회담대표들에게 불같이 怒號(노호)했다.
 “유엔군 병사만 인간이고, 우리 한국군 병사는 인간이 아니냐? 북한군에 강제로 편입된 한국군 병사를 왜 구하려고 하지 않는가?”
 민족적 義憤(의분)에 휩싸인 이형근 장군은 즉각 사표를 내던졌다.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이형근 장군의 회담대표 辭意(사의)를 수리했다. 때마침 白善燁 장군이 제2군단장으로 전출되었는데, 이형근 장군은 白善燁 장군의 후임으로 제1군단장이 되었다. 유엔군 측 대표단의 한국군 대표는 劉載興(유재흥) 참모차장으로 바뀌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흑색 선전: “美, 毒가스를 사용”

 새해가 밝아 1952년 1월2일, 유엔 측은 任意送還(임의소환) 및 同數交換(동수교환) 방식을  제의했다. 공산 측이 포로가 된 한국장병들 중 지원 희망자를 수용해 북한군에 편입시켰다고 주장한 데 대해, 유엔군 측은 포로의 意志(의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맞받았다. 물론, 이에 공산 측은 거부했다. 1952년 1월15일, 워싱턴은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에게 다음 내용의 訓令(훈령)을 보냈다.
 
“국제적십자위원회의 입회 아래 포로의 意向(의향)조사를 시행한다. 또 유엔군 측은 공산군의 비행장 증설 문제에서 양보하고, 그 대신에 공산 측은 任意(임의)송환에 동의한다― 이렇게 제의한다면 어떤가?”
 
 비행장 문제는 휴전 후 軍用(군용) 비행장의 증·개축을 시도하려는 북·중 측의 시도에 대해 유엔군 측은 이를 금지할 것을 요구했었다.  비즈니스에서도 한 쪽이 성의를 보이면 다른 쪽도 和答(화답)하게 마련이지만, 공산주의자에게는 이런 인간적 거래가 통하지 않았다.
 회담은 암초에 부딪쳤다. ‘강제송환’에 대한 공산 측의 의지는 소름끼칠 정도였다.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早期(조기) 타결에 비관적이었다. 공산 측은 흑색 선전을 감행했다. 1952년 2월 초순, 소련의 유엔대표 말리크는 “미군이 毒(독)가스를 사용했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내가 모르는 일을 어떻게 蘇聯(소련)이 안다는 거냐”라며 즉각 내부조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공산 측의 공연한 트집이었다. 유엔군사령부가 全지휘관에게 발한 CBR 防護指令(방호지령)에 대해 꼬투리를 잡았던 것이다. 이 지령은 “화학·생물·방사성 무기에 대한 방호책을 강구하라”는 지시였다. 
 毒가스 논쟁이 치열해지는 1952년 2월 하순, 공산 측은 또 다른 시비를 걸어왔다. 모스크바, 北京(북경), 平壤(평양)의 신문·라디오 등 선전·선동 매체가 “미군은 北조선과 만주에서 細菌戰(세균전)을 벌이고 있다”라며 대대적인 흑색 캠페인을 벌였던 것이다.
 유엔군 측은 즉각 국제적십자위원회에 實情(실정)의 조사를 의뢰했다. 그런데 공산 측은 국제적십자위원회를 ‘유엔군의 스파이’라고 주장하며 현장조사를 거부했다. 이에 유엔군은 세계보건기구(WHO)에 조사를 의탁했지만, 이것도 공산 측에 의해 거부되었다.
 공산 측이 현장 조사를 기피함으로써 미군에게 씌워진 공산권의 비난은 설득력이 없어졌다. 공산 측은 宣傳戰(선전전)에 열을 올렸지만, 오히려 국제사회의 신용을 잃었다.

反共포로와 親共포로가 반반

 1952년 4월1일, 유엔 측은 포로문제 小委(소위)에서 모험을 시도했다. 본국에의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와 희망하지 않는 포로를 선별해서, 後者(후자)를 포로명부로부터 삭제하고, 前者(전자)만으로 전체교환에 응한다는 안을 내세운 것이다.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귀국을 희망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심사가 필요했다. 그날 小委에서 유엔군 대표 히크만 대령은 포로에 대한 公開審査(공개심사)를 타진했다.

“유엔군은 이제까지 포로의 意向(의향) 조사를 실시한 일이 없다. 심사를 받을 포로에게 어떤 압력을 가했다고 의심받는 것은 本意(본의)가 아니다. 우리들은 북한 및 중국 본토에의 귀국 희망자는 11만6000명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이것을 실제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제안에 공산 측이 솔깃했던 모양이다. “우리들로서도 돌아오려고 하지 않으려는 者(자) 를 알고 싶다. 아마도 1만6000 명 이하겠지만…”이라고 공개심사에 동의했다. 유엔군은 1952년 4월8일부터 서둘러 공개심사에 착수했다.
 공개심사는 일부를 제외하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일부라고 하는 것은 거제도에 설치된 포로수용소에서 1952년 2월18일 유혈사태(2·18사건)가 일어나, 포로수용소의 7개 구획이 골수 親共 포로에게 장악되어 거의 治外法權(치외법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구획에서는 “우리들은 北으로 돌아간다. 심사는 필요 없다”며 실력으로 심사를 방해했다. 물론, 北으로 가고 싶지 않는 反共포로들의 발언을 봉쇄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7개 구획의 포로 숫자는 약 3만7000 명. 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자의 숫자가 그 중 몇 %나 되는지 推定(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심사를 강행한다면 또다시 유혈사태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요원 부족으로 親共(친공) 7개 구획을 겨우 통제는 하고 있었는데, 그 내부는 극렬 친공포로들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유엔 측은 어쩔 수 없어 해당구획의 전원을 귀국희망자로 간주하게 되었다.
 심사결과가 집계되었다. 13만2000명의 포로 중 본국송환희망자가 6만9100명, 송환거부자가 6만2900명으로 거의 반반이었다. 송환거부자는 공산 측의 ‘허용범위 1만6000명’의 거의 네 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4월19일, 유엔군 대표 히크만은 중공군 대표 蔡淸文(채청문) 대좌에게 공개심사의 결과를 전했다. 蔡淸文은 귀국을 희망하지 않는 자의 숫자를 알면 새파랗게 질려 얼어붙었다.
“심사 결과를 가지고 돌아가 연구하고 싶다. 휴회하고…”
 蔡淸文 대좌는 황망스레 회의장에서 퇴장했다. 다음날(4월20일)부터 공산 측은 맹렬한 규탄을 시작했다.  “당신들은 우리들을 故意(고의)로 속였다. 貴官(귀관)의 입으로 말했던 11만6000 명이란 숫자는 萬愚節(만우절) 놀음인가!”
 蔡 대좌는 얼굴을 붉히며 히크만을 비난했다. 히크만이 그런 숫자를 입에 담은 날짜는 확실이 萬愚節(만우절)인 4월1일이었다. 히크만은 왜 당초의 추정에 착오가 생겼는지를 설명했지만, 蔡淸文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리지웨이는 그 전말을 보고받으면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包括提案(포괄제안)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未決(미결)로 남아 있는 중요 문제는 세 가지. 첫 번째는 비행장 문제, 두 번째는 중립국감시위원회의 구성문제, 그리고 나머지 세 번째는 포로의 송환문제였다.
 리지웨이는 세 懸案(현안) 중 첫 번째는 양보하고, 두 번째는 소련을 중립국감시위원단 맴버에서 제외하는 대신에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권 2개국으로 하며, 세 번째는 포로가 된 유엔군 측 장병 1만2000 명과 포로가 된 북한군·중공군 장병 중 본국송환희망자 6만9100 명을 교환한다고 하는 포괄제안으로 휴전교섭 타결의 成敗(성패)를 걸었다.
 4월28일, 조이 수석대표는 포괄제안을 공산 측에 설명했다. 그러나 공산 측 수석대표 南日(남일)의 반응은 냉담했다.  
“우리들은 이번 제안이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南日은 무기한의 휴회를 제의하고 회담장을 떠났다. 리지웨이의 타협안은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인민재판소를 설치, 사형까지 집행한 극렬 포로들

 말머리를 다시 거제도포로수용소장의 납치사건 前後(전후)로 돌려야 할 것 같다. 1952년 3월20일, 프란시스 T. 돗드 准將(준장)은 거제포로수용소장으로 발령받았다. 밴플리트 제8군사령관의 막료로부터의 전출이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폭동인 2·18 사건이 일어난 직후이다.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도 포로의 통제 유지가 관심사였다. 좁은 섬에  너무 많은 숫자다. 강압만으로는 통제가 어려울 것이다. 穩健策(온건책)도 유효하다. 貴官(귀관)의 책무는 중요하다.”
 밴플리트 8군사령관은 돗드 준장에게 포로수용소 근무가 얼마나 골치 아픈 임무인가를 위와 같은 내용으로 설명했다. 돗드는 충격을 감추고 轉任(전임)에 응했다.
  “거제도(포로수용소)는 지휘관의 무덤이다”
이는 前任(전임) 포로수용소장의 말이었다. 돗트는 10代 포로수용소장이다. 전년(1951년) 1월에 개설된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는 말썽이 자주 일어나, 수용소장의 평균 在任(재임)기간이 겨우 1개월 정도에 불과했다. 즉, 2·18사건에서는 다수의 포로들이 폭동에 가담했기 때문에 경비병들이 발포해 포로 55 명이 사망하고, 162명이 負傷(부상)했다.
 역대 수용소장은 이와 같은 폭동과 그 뒤처리의 不良(불량) 등에 책임을 지고, 降等(강등)·좌천·퇴역 등의 처분을 받았다. 참으로 지휘관의 무덤이었다. 

 돗드는 근심스런 얼굴로 거제도에 着任(착임)했다. 1899년 인디아나 출생의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거제도는 馬山 앞바다에 위치한 섬이다. 6·25 동란 전에는 인구 12만의 半農半漁(반농반어)의 조용한 섬이었다. 여기에 10만 명의 피난민이 갑자기 몰려오고, 다시 13만 명의 포로가 들이닥쳤다.
 돗드는 섬 전체를 돌아보고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山地(산지) 투성이로 평지는 적다. 댐이 없어 물도 부족하고, 항만시설이 빈약해 자재의 반입도 어려웠다. 그땐 물론 連陸橋(연육교)도 없었다.
 수용소라면 구획 마다 독립시켜 서로 연락을 취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그럴 만한 부지가 없었다. 섬의 중부권 소재 2개의 계곡에 4개의 구획을 설치, 각 구획을 8개의 小구획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서는 부족해 小구획 사이에 철조망을 치고 새롭게 小구획을 만들었다. 좁은 장소에 13만 명을 웃도는 포로들.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돗드는 문제의 심각성에 고민했다.
 수용소의 경비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휴전 교섭이 시작되고부터 수용소 내에서는 종래의 사소한 분쟁이 질적으로 변화했다. 포로들은 본국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아닌가를 놓고, 親共派(친공파)·反共派(반공파)로 갈려 격렬하게 대립했다. 兩派(양파)의 치열한 논쟁은 폭력사태로 번져 급기야 전쟁상태로 돌입했다. 

 친공파는 귀국 의사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 자 또는 반공파를 협박하고 학살해 생매장하기도 했다. 포로들 중에는, 원래 한국군 혹은 한국인인데 무리하게 북한군에 편입된 자가 많았다. 세력적으로는 친공파가 약간 우세했다. 친공파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구획도 생겼다. 정치위원회와 인민재판소까지 설치, 사형까지 집행하고, 드디어는 유엔군 장병들의 출입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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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이 만든 무기와 선전 자료.

 왼쪽의 사진은 제72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이 만든 무기와 선전 자료이다. 단도는 기름통, 소총은 나무로, 수류탄은 깡통으로 만들었다. 미군 장병들은 수용소 안에서도 전쟁을 계속하는 친공파 포로들의 심리상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미군 장병들은 포로의 인권에 重點(중점)을 두고, 兩派(양파) 사이의 분규에는 기본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귀찮은 경비는 한국군에게 떠맡기고 미군 근무자들은 無事安逸(무사안일)로 흘렀다. 당연히, 국군 경비병은 반공파를 비호하고 친공파에게 엄격했다.
 
소통 좋아하다 신세 망친 포로수용소장

 돗드 所長(소장)의 부임 직전인 3월13일에도, 또다시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국군 경비병이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발포, 사망자 12명, 부상자 26명이 발생했다. 이에 돗드는 어리석게도 소위 ‘햇볕정책’을 구사하기로 작심했다.
 휴전 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북한은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유도하기 위해 후방 교란을 노려 이데올로기 싸움에 능한 선동꾼을 포로수용소에 일부러 집어넣었다. 이건 간단한 일이었다. 전쟁이 계속되던  때라 전쟁터에서 일부러 잡히면 포로수용소에 보내지게 마련이었다.
 그런 선동꾼이 힘을 발휘했다. 포로들을 조직화하고, 단단한 상호연락망을 만들었다. 병원의 공동병실에서 간부회의를 열고, 징벌제도를 도입해 조금이라도 反共(반공)의 태도를 보이는 자들을 즉시 처형했다.       
 이렇게 공포의 통치체제 아래 데모와 실력행사, 그리고 폭동을 자주 일으켜 세계의 이목을 巨濟島(거제도)로 향하게 만들었다. 공산 측은 이 후방교란 작전에 의해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진행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돗드는 포로들과 대화하기 위해 허리에 권총도 차지 않고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은 通用門(통용문)에 접근하여 소위 疏通(소통)을 시도했다. 공산 측을 격노시킨 공개심사를 통해 ‘본국송환’을 희망하지 않는 포로들을 거제도 밖에서 수용하도록 해 일단 분쟁의 불씨를 제거했다.

 1952년 4월 말, 남은 포로들을 17개 구획으로 나눠 수용했다. 10개 구획은 심사를 끝냈으나, 나머지 7개 구역은 사실상의 ‘治外法權’(치외법권)을 획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사를 할 수조차 없었다. 따라서 포로명부도 부정확했다. 또 그 속에 감추어진 反共포로가 얼마나 되는지 전혀 판단되지 않았다. 표면상 거제도수용소의 全포로가 공산주의자 一色으로 되어 포로들은 점점 다루기 어려운 존재로 변했다.
 5월6일, 가장 강경 분자가 모인 제76구획의 리더로부터 수용소장과 면담하고 싶다는 신청이 들어왔다. 다음날인 5월7일 오후, 돗드는 마음 가볍게 나가 자물쇠가 잠기지 않은 通用門(통용문)을 사이에 두고 포로들과 대화했다. 이러는 사이에 다수의 포로들이 몰려왔다.
 “말이 잘 들리지 않으니 좀 가까이 다가오시오”
돗드는 약간 더 다가갔다. 포로들의 리더가 휴전회담의 경과를 자세히 묻기 시작했다.
 “조금 안으로 들어와서 모두에게 들리도록 말씀해 주시오”
수행했던 레이븐 중령이 황급히 다가와 말렸다. 
 “그건 안 됩니다”
레이븐은 포로들에게 납치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에 면역이 없었던 돗드는 다시 접근해 대화했다. 오후 3시가 지나고 있었다.
 “이제 끝내도록 하지…”
돗드는 뒤로 돌아서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포로들은 일제히 돗드에게 달려들어 “앗!” 하는 순간에 그들의 지배 구획 안으로 끌고 가버렸다. 레이븐은 가까이에 있는 기둥에 매달려 버텼다. 그러는 가운데 소총에 着劍(착검)한 경비병들이 달려와 레이븐 중령만은 납치를 모면했다.

 평소, 경비병은 총에 탄환을 장전하지 않았다. 돌발적인 유혈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그런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돗드 납치는 면밀한 계획아래 실행된 것이었다.
수용소 측은 포로들이 감히 所長을 납치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부주의라면 부주의였지만, 포로의 이런 저돌성은 역사상 그런 類例(유례)가 없었다.
 “당신들은 나의 善意(선의)를 배반했다. 나의 부하가 나를 구하려고 무력을 행사한다. 그러면 엄청난 사망자가 나올 거다!”
붙잡힌 돗드는 위와 같이 으름장을 놓기는 했다.
 “소장도 군인이니 알 것이다. 우리는 명령을 받고 임무를 수행했다. 소장의 신변 안전을 보장한다. 사태의 개선을 위해 事實(사실)만을 규명하고, 그 사실에 기초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무리한 제의는 하지 않을 것이니 협력할 것은 협력해 달라.”
난동의 리더는 부드러운 언동으로 돗드를 구워삶으려 했다.
“나는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수용소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여러 분의 요구에 응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노력을 아끼지는 않겠다”
 돗드는 이런 발언으로 위엄을 잃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실수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깨닫고 놀랐다.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밴플리트 8군사령관에게 즉각 사태의 해결을 명했다. 이 무렵, 리지웨이의 신변이 바빠졌다. 아이젠하워 元帥(원수)가 NATO(북대양조약기구) 최고사령관의 직을 離任(이임)하고, 共和黨(공화당) 대통령 후보로의 指名(지명)을 겨냥해 선거운동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리지웨이는 아이젠하워의 후임으로 보임되어 늦어도 5월12일까지 유럽으로 向發(향발)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바로 그때 거제도 사건이 발생했다. 리지웨이 大將(대장)의 후임은 웨스트포인트 동기생이며 절친 인 마크 W. 클라크 大將이었다. 클라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로마 解放(해방) 작전에 성공했고, 戰後(전후) 오스트리아 進駐軍(진주군)사령관 겸 高等辦務官(고등판무관)으로서 이 나라 중립화협정에 관한 外交戰(외교전)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그때 상대였던 소련에 능숙하게 대처했다. 

 1952년 5월7일, 클라크는 하네다(羽田) 공항에 도착했다. 가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돗드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는 리지웨이에게 말했다.
 “맷트(리지웨이의 애칭), 공산주의자는 선전전에만 강해. 포로수용소 안에서 所長(소장)을 포로로 잡은 것을 무슨 영웅적 행위로 세계를 향해 자랑할 거야. 이따위 무리한 짓은 힘으로 눌러버려야 해!”
 리지웨이는 難題(난제)를 후임자에게 남기고 그냥 떠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밴플리트와 연락을 취하면서 상황파악에 노력했다. 한편, 돗드를 인질로 삼은 포로들은 ▲전화를 가설해 달라 ▲천막이 필요하다 ▲책상도 가져오라는 등의 요구를 거듭했다. 돗드로부터는 자신에게 危害(위해)가 가해지지 않았으므로 무력행사를 하지 말고 타협해 달라는 간청이 전해졌다.
 5월8일, 밴플리트는 돗드를 해임하고, 제1군단 참모장 찰스 F. 콜슨 准將(준장)을 포로수용소장으로 삼아, 즉각 거제도에 부임시켰다. 콜슨은 무력으로 위협하면서 포로 측과의 교섭에 나섰다.
 같은 날, 클라크와 함께 한국에 날아온 리지웨이는, 밴플리트 8군사령관이 돗드 구출을 최우선시하는 것에 불만을 나타냈다. 직업군인의 길을 선택한 인간은 누구라도 非命(비명)에 쓰러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 리지웨이의 생각이었다. 리지웨이는 “탱크를 포함해 여러 무기를 사용, 즉각 포로수용소의 질서를 회복하라”고 밴플리트 8군사령관에게 명했다.

두 번 배신한 李學九

 포로수용소 別棟(별동)에 수용되어 있던 북한군 대좌 李學九(이학구)는 5월7일 수용소 측으로부터 “돗드 所長을 석방하도록 난동 수뇌부를 설득해 주지 않겠는가”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학구는 投降(투항) 당시 북한군 제13사단 참모장이었다. 이제, 조금만 밀어붙이면 釜山圓陣(부산원진)을 깨고 유엔군을 부산 앞바다로 밀어 넣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1950년 9월 중순에 전세는 反轉(반전)되었다.
 1950년 9월15일 미군의 仁川(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고, 釜山교두보의 유엔군이 반격을 개시했다. 그때 多富洞(다부동)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던 白善燁(백선엽) 장군의 국군 제1사단이 이번에는 북한군의 포위를 뚫고 북상한 뒤 다시 남하, 미 제1기병사단과 함께 逆(역)포위의 태세를 취하자, 북한군은 戰意(전의)를 상실했다. 이미 포탄이 없고, 兵糧(병량)도 떨어진 상황이었다.
 바로 이 무렵, 이학구는 대치하던 미군에 항복했다. 그것이 그의 실수였다. 만약 그가 국군에 투항했다면 그의 軍歷(군력)으로 미루어 그는 국군 장교로 起用(기용)될 수 있었다.
 예컨대 북한군 제13사단의 포병연대장 鄭鳳旭(정봉욱) 중좌는 공산주의의 허구성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고 이학구 대좌의 항복과 거의 같은 시기에 국군 제1사단에 투항했다. 실제로, 정봉욱은 국군으로 變身(변신)해 육군 少將에까지 累進(누진)했다. 1970년, 그는 논산(제2)훈련소 소장이 되어 그곳의 악명 높았던 부정부패를 일소, ‘깨끗한 국군의 요람’을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은 그들의 원칙에 따라 이학구 대좌를 일반 포로와 같이 취급했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이학구의 기대도 사라졌다.
 “이런 나더러 포로들을 설득하라구. 나보다 계급이 높은 자가 신분을 감추고 잠입해 있는 판에…. 그러나 요청을 거절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 줄도 몰라. 잘하면 나에 대한 미군의 대접이 달라질지도 모르고…”
 이학구는 복잡한 계산을 품은 채 76구획으로 갔다. 포로들이 이학구를 꾸짖었다.
 “배반자! 너는 무엇 하러 여기 왔나? 투항 후 너는 바로 美帝(미제)의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스피커로 ‘빨리 투항하라’고 떠들지 않았던가?”
여기서 포로들을 설득하려 든다면 그들에게 살해당할 게 뻔했다. 이학구는 또 한 번의 배신을 결심했다. 이학구가 포로들에게 맹세했다.
 “이제, 나는 여러 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
이로부터 이학구는 그의 본의인지는 모르겠지만, 포로들의 표면상의 지도자가 되었다. ‘朴’이라 불리던 실제 리더는 이학구를 前面(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교묘히 숨어서 지령만 내렸다.

포로의 요구에 굴복한 新任 포로수용소장

 이학구는 背後(배후) 리더의 지시에 따라 협상 前面에 나섰다. 1952년 5월8일, 이학구는 몇 가지 요구를 들이밀고, 그것이 충족된다면 돗드를 곧 석방하겠다면서 시간을 벌었다. 그날 오후에 리지웨이, 클라크, 밴프리트 등이 거제도에 왔지만, 그것은 이학구가 알 바 아니었다. 진압작전 계획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다음날인 5월9일, 콜슨 새 所長(소장)으로부터 공문서가 포로들에게 전달되었다.    
 “돗드 준장을 석방하라. 돗드 준장은 소장직에서 해임된 만큼 지휘권도 교섭권도 없다. 돗드 준장을 석방하지 않을 경우 時限(시한)을 정해 실력 행사를 한다”     
포로 측은 이를 무시했다. 6시간이 경과한 후 콜슨 所長의 경고가 다시 들어갔다.
 “當方(당방)은 실력 행사를 주저하지 않는다. 시한은 翌(익) 10일 오전 10시까지다”
이학구가 通用門(통용문) 앞에까지 나와서 이렇게 고함쳤다.
 “돗드 所長은 유엔군이 포로를 학살하고, 잔학행위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자백했다. 돗드 준장이 소장의 직을 박탈되었다고 한다면, 새 소장이 돗드와 함께 우리들과의 회합에 참석할 의무가 있다” 

 이제, 포로 측은 필사적이었다. 돗드를 인민재판에 걸어서 ‘罪狀’(죄상)을 ‘自白(자백)’시키려 했다. 또 板門店(판문점) 공산측 대표단으로부터 指令(지령)를 받아 포로수용소장에 대한 요구 문서의 英譯版(영역판)을 만들었다. 포로들은 인질을 잡고 있는 한 그들 쪽이 강하다고는 생각했겠지만, 미군 측이 돗드의 생명을 단념하면 형세는 역전될 것이었다.
 문서는 ①협박, 감금, 대량 살인, 毒(독)가스·세균병기의 사용 등 포로에 대한 불법행위를 즉시 정지하라 ②任意(임의)송환을 즉시 철회하라 ③강제적인 심사를 즉시 중지하라 ④포로로부터 선발된 포로대표위원회를 승인·협력하라 등 네 가지 항목의 요구에 대한 성의 있는 문서회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실력 행사의 時限(시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수용소 안은 이상한 공기에 휩싸여 있었다. 이학구는 문서를 수용소 측에 넘기면서 “문서회답이 있으면 돗드 所長을 빨리 석방하겠다”고 언약했다.
 사태가 이렇게 움직이자 콜슨 신임 소장은 실력행사를 주저했다. 5월10일 오전 10시가 아무 일 없이 그냥 지나갔다. 이학구 등이 예상한대로 양측의 막후협상이 진행되었다. 결국 콜슨은 돗드를 해방시키기 위해 실로 어이없는 회답을 하고 말았다. 그것은 포로 측에 절대 유리한 것이었다. 요구의 제①항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

<유엔군에 의해 다수의 포로가 殺傷(살상)된 유혈 사례가 있었던 것을 인정한다. 포로는 국제법에 따라 이 수용소에서 人道的(인도적) 취급을 받는 것을 今後(금후) 보증한다. 나는 오늘 이후, 폭력과 유혈을 피하기 위해 全力을 다한다.>
 
 제②항목의 임의송환의 즉시 철회는 수용소장의 권한 밖의 일이고, 제③항목의 강제적인 심사의 즉시 중지문제는 이미 유엔군 측에 인식시키고 있다. 새로운 것은 이 요구 제①항목에 대한 회답이었다. 5월10일 밤 9시30분경, 이학구는 돗드를 석방했다. 돗드는 걸어서 돌아와 즉각 자기의 동료에 의해 감금되었다.

反共포로 5만 명의 인권을 위해 10만의 전사상자 감수한 유엔군

 1952년 5월12일, 클라크 대장은 유럽으로 떠나는 리지웨이 대장을 일본 하네다(羽田) 공항에서 전송했다. 리지웨이는 “붕괴된 미 제8군을 다시 일으켜 세운 공로자이기는 하지만, 워싱턴의 뜻에 너무 추종한 군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클라크는 돗드 소장 납치사건의 뒤처리에 착수했다. 부하를 두둔하면 조직이 썪는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다음의 의견을 워싱턴에 보냈다.
 
“돗드는 너무 부주의했다. 납치된 후 공산주의에게 유리하도록 움직였다. 콜슨은 최종의 회답문서를 독단으로 포로들에게 手交(수교)해, 휴전회담에서 유엔군 측의 입장을 불리하게 했다. 2인 모두 대령으로 강등해야 할 것이다.”

 
 미 陸軍省(육군성)은 클라크의 具申(구신·자기 의견 등을 밝힘)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2인 모두 대령으로 강등되고, 돗드는 다음 해에 퇴역했다. 역시 거제도는 지휘관의 무덤이었다. 걱정했던 대로 휴전회담에서 거제도 사건이 악용되었다. 1952년 5월16일, 공산 측 수석대표 南日이 ‘콜슨의 문서’를 번쩍 쳐들고 계속 억지 공격을 했다.

“貴軍(귀군)의 포로수용소장이 포로에 대한 취급이 非인도적인 것, 暴虐無慘(포학무참)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강제적인 심사에서 포로의 송환 희망국을 왜곡했다는 것, 포로를 강제적으로 재무장시켜 前線(전선)으로 보냈던 것 등 양심의 가책을 견딜 수 없어 일련의 범죄행위를 全세계를 향해 고백했다. 이것이 그 증거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東京에서 이에 관한 보고를 듣고, “저 공산주의자 놈들, 유럽에서처럼 極東(극동)에서도 넌더리도 내지 않고 黑을 白이라고 우길 것인가!”라고 분개했다. 유엔군 측이 아무리 그런 사실이 없다, 회답은 돗드 소장의 목숨이 걸린 위압적 상황에서 무리하게 쓰여진 것이라고 반론을 해도 공산 측은 선전전을 통해 유리한 입장에 섰다.
 클라크는 콜슨의 文書가 유엔군 측 대표단의 사기를 현저하게 약화시킨 데 대한 보복으로 거제도의 親共派(친공파)를 해체하기로 했다. 제주도 및 본토에 3분할을 하여 수용하는 작전이었다.
 6월10일, 작전 실행에 착수. 移轉(이전)을 저지하기 위해 참호에 들어가서 저항하는 포로들을 無力化(무력화)시켰다. 저항그룹에는 표면적 리더인 이학구도 섞여 있었다. 그러나 이학구 本人(본인)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강제이전 문제는 비교적 평온하게 해결되었다. 단호하게 처리하면, 결국 포로는 포로였다.
 분규에 분규를 거듭하던 휴전회담도 드디어 포로송환 문제만을 남긴 상황이 되었다. 이 문제는 任意(임의) 송환인가, 강제 전체 송환인가 하는 문제였다. 북한이나 중국 본토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5만여 명의 포로를 어떻게 할 것이냐로 收斂(수렴)된 것이다.
 5만 여 명으로 약간 감소한 것은 유엔군 측의 再심사 결과, 本國 송환 희망자가 8만여 명으로 늘어난 때문이었다. 공산 측이 반길 만한 숫자였지만, 상대가 솔직하게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공산 진영은 이념과 체면 때문이겠지만, 경직된 자세를 풀지 않았다. 그 사이, 전장에서는 매일 수백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나왔다. 결과적으로 전쟁은 그로부터 1년 더 계속되고, 그 1년간에 유엔군 측만으로도 사상자가 10만 명 이상 발생하게 된다. 포로 5만 명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유엔군 측은 그 2배 이상의 희생자를 내는 非논리적인 경과를 거치게 되었다. 공산군 측의 사상자는 유엔군의 3∼4배에 달했다.    
 1952년 6월23일,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종래 聖域(성역)으로 제외해 온 압록강의 水豊(수풍)댐의 폭격을 명했다. 그러나 워낙 견고한 구조여서 붕괴에는 이르지 못해 적을 체념시킬 정도의 타격을 주지 못했다. 드디어 타결 방식을 찾지 못해 1952년 10월, 휴전회담은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1953년에 속개되는 휴전회담과 그 타결 과정은 뒤에서 거론할 것이다.
 
 필자는 거제시 계룡로 61번지(고현동)에 소재한 거제도포로수용소 내부를 약 2시간 동안 둘러보았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일부 잔존 건물과 당시 포로들의 생활상, 막사, 사진, 의복 등 생생한 자료와 기록물들을 바탕으로 유적공원을 조성해 이제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
 포로수용소 주차장 바로 위에는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와 영화 <국제시장>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던 흥남철수작전의 기념조형물을 제작·전시하고 있다. 구조작전에 참가한 ‘메러더스 빅토리호’를 형상화한 것이다. 1950년 12월의 흥남철수 당시 10만 명의 북한주민이 후퇴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따라 南下했다는 것은 南北의 體制(체제) 경쟁에서 南이 승리했다는 기념물이기도 하다. 

국제시장은 자본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입증한 삶의 현장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 미국 해군의 底力(저력)을 새삼 느끼게 된다. LST(대형 양륙함)이 船首(선수)의 ‘아가리’[通路]를 河馬(하마)처럼 쩍 벌리고 부두에 野積(야적)된 엄청난 차량과 물자를 삼키고[積載] 있다.
 흥남 철수에 동원된 미국 해군 함정은 LSU(揚陸艇) 9척을 탑재한 LSD(도크型 양륙함) 3척, LST(대형 양륙함) 11척을 中核(중핵)으로 하는 제90임무부대 소속이었다. 이 작전에 의해 국군과 유엔군 10여 만 명, 피란민 9만8000명, 차량 1만8000대, 자재 35만 톤을 실은 군함과 수송선이 南下해 부산항과 그 인접항 등에 入港(입항)했다.
 필자는 부산에 가면 水晶洞(수정동) 산복도로에 올라가 釜山北港(부산북항)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곤 한다. 3년1개월의 전쟁 중 이 항구를 통해 延 300만 명을 웃도는 유엔군 장병들이 오갔다. 전쟁기간 중에 하루 4만톤이란 拔群(발군)의 양륙능력을 지녔던 부산북항은 戰線(전선)을 떠받치는 전쟁물자와 후방을 먹이는 구호물자를 쉬지 않고 받아들인 대한민국의 생명줄이었다.
 현재, 부산북항과 釜山新港(부산신항)과 합친 부산항의 컨테이너 화물 취급량은 세계 제3위로 랭크된다. 지금은 북항의 부두에 대형 컨테이너 크레인이 가득하지만, 화물수송의 컨테이너化(Containerize)는 1966년 월남전 이후의 일로서 6·25동란 때 부산항에는 해군함정, 벌크선, 일반화물선 등이 입·출항했다.
 따지고 보면 국제시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처음으로 全세계를 향해 입증한 삶의 현장이었다. 북한 피난민 300만의 대부분은 부산교두보로 南下(남하)했고, 국제시장은 그들의 대표적 생활전선으로 훌륭하게 기능했기 때문이다. 

 부산이 고향인 필자의 절구 중에는 이북 출신이 많다. 슬 한잔 걸치면 그들은 으레 항구도시 부산의 開放性(개방성)을 찬양한다. 실제, 국제시장의 商權(상권)을 장악한 ‘맨 파워’는 이북 출신이었다.
 평양냉면과 불고기, 함흥냉면과 함경도 아바이 순대도 이제 남한사람들에게 친숙해졌다. ‘부산 밀면’은 이북 피난민들이 쉽게 구할 수 없었던 메밀 대신에 구호물자인 밀가루에다 고구마 전분을 섞어서 만들었던 것이다. 서울 종로5가 광장시장의 ‘녹두빈대떡’이라면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 元祖(원조)는 황해도다. 
 還都(환도) 후, 동대문시장, 청계천 상가에도 진출하여 富者(부자)가 된 이북출신들이 수두룩하다. 이만하면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당성은 세계사에 필적할 정도이다. 앞으로의 통일 후 올바른 역사교육만 실시한다면 남북한 사람의 사회적 통합에 대한 걱정은 참으로 杞憂(기우)에 불과할 것이다. 말머리를 다시 한국전쟁 중에 전개된 광범한 해상작전으로 돌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동해연안의 휴전선이 80km 북상한 까닭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때 한국과 가까운 日本 근해에 있었던 미 해군부대는 ‘마운트 매킨리’를 중심으로 하는 水陸兩用戰部隊(수륙양용전부대), 순양함 ‘주노’와 4척의 구축함, 6척의 掃海艇(소해정) 뿐이었다. 정규 항공모함 ‘바레 포지’를 근간으로 하는 제7함대의 空母艦隊(공모함대)는 中共과 臺灣(대만)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南中國海(남중국해)로 항해 중이었다.
 오키나와 中城灣(나카구수쿠灣)에서 英國 항공모함 ‘트라이엄프’와 합동한 미 제77임무부대는 1950년 7월1일 출항, 7월3일부터 평양 공격의 임무에 종사했다. 이때 공격목표는 海州(해주) 비행장 및 평양 주변의 철도·철교였다.
 임무부대는 북한군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공격을 계속했다. 그 중에서 결정적인 것은 1950년 7월18일의 元山(원산)정유소 공격이었다. 이 공격에 의해 120만 톤의 석유제품이 불타고 年産(연산) 170만 배럴의 정유소가 파괴되었다.
 더욱이 맥아더의 요청에 의한 1950년 11월9∼21일에 걸쳐 실시된 鴨綠江(압록강) 교량에 대한 공격, 1952년 6월의 압록강의 水豊(수풍)발전소 공격, 그해 9월의 阿吾地(아오지)정유소 공격에서 보여지 듯 항공모함의 항공부대는 전쟁의 각 단계에 있어서 전략목표에 대한 공격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중에서도 한국과 일본 후쿠오카(福岡)에 전개한 미 제5공군의 전투행동 半徑(반경) 밖의 전략 목표에 대한 공격에 있어서 항공모함이라는 移動基地(이동기지)의 중요성은 결정적이었다. 특히, 한국전쟁에서는 지상군을 엄호하는 항공모함 發進(발진)의 근접항공지원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
 근접항공지원은 미 해군이 태평양전쟁의 島嶼(도서)전투를 통해 개발·발전시킨 것으로 지상군에 대한 매우 유효한 화력지원이었다. 50년 7월29일에는 영국 항공모함 ‘트라이엄프’가 임무부대를 떠나고, 미국의 대서양함대로부터 待望(대망)의 정규 항공모함 ‘필리핀 시’가 한국해역으로 달려왔다. 레이테를 포함 2척의 항공모함은 이후 교대로 ‘2일 작전, 1일 보급’의 사이클로 제8군에 대한 근접항공지원을 계속했다.
 한국전쟁 중 특필해야 할 近接(근접)항공지원은 1950년 12월에 항공모함 ‘필리핀 시’ ‘레이테’ 등에 의해 실시된 미 제1해병사단의 유담리 철퇴 지원이 손꼽혀진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항공기는 해병대의 철수를 엄호했다. 미 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의 흥남철수도 미국의 제해권 하에서 가능했던 것이었다.
 한반도의 現휴전선을 보면 동해안에서만은 38선상의 其士門里(기사문리)에서 약 80km 북상해 북위 38도 35부의 통일전망대(고성군 송현진리)까지 돌출해 있다. 돌출부는 원뿔형이다. 이에 대해 동해안 전선의 국군 제1군단을 거쳤던 백선엽 장군은 지상부대에 대한 함포지원의 효과를 지적하고 있다. 
 “동해안에서는 미 해군의 압도적 화력지원을 받았다. 함포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이 함포 지원 때문에 적은 국군 제1군단 전투구역의 동쪽 절반에는 감히 들어오지도 못했다”    

미 공군의 항공우세 
 
 지상에서는 1950년 10월24일에 중공군이 개입했지만, 하늘에서는 1950년 11월1일에 6機의 Mig15가 유엔공군 航空統制班(항공통제반)의 모스키토 및 F51을 공격해 왔다. 그러나 미군기는 平壤(평양)비행장에 무사히 돌아왔다. 11월8일에는 F80과의 사이에 공중전이 벌어졌다. 이 제트기끼리 史上(사상) 최초 공중전에서는 F80이 전투경험이 부족한 Mig15를 격추시켰지만, 성능은 Mig 쪽이 오히려 우수했다.
 B29는 新義州(신의주) 상공에서 피격, 金浦(김포)비행장에 不時着(불시착)했다. 항공기술의 진보는 빨랐다. 5년 전만 해도 ‘하늘의 요새’라 불리던 B29도 Mig기 앞에서는 무참했다. F80이 Mig기보다 劣性(열성)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급거 F84E(선더제트)와 F86A(세이버)의 2개 Wg(航空團·Wing)을 파견했다. 1개 항공단은 2개 Sq(方陣·Square)로 이뤄진다. 

 F86A는 1950년 12월6일 첫 출격을 실시한 이래 12월 중에 236 소티를 출격, Mig 8기를 격추하고, 7기를 격파했다. 소티란 1機가 1回 출격하는 것을 의미한다. Mig기는 점차 上昇(상승), 空中集合(공중집합) 및 가속 등의 성능이 증강된 후에 만주로부터 북한에 진입, 전투기掃討(소토·특정 空域·시간에 적 전투기를 排除하는 비행)를 계속하면서 南下, 청천강 河口 부근에 도달하면 큰 半徑(반경)으로 右旋回(우선회)하면서 돌아갔다.
 압록강 北岸(북안)의 安東(지금의 丹東)비행장에는 점차 Mig기가 증강 배치되었지만, 비행은 압록강 區域(구역)에 제한되어 있었다. 미군기가 압록강에 접근하면 Mig는 砂煙(사연)을 일으키며 이륙하고, 일거에 미군기보다 높은 高度까지 상승, 4機 단위의 編隊群(편대군)으로 韓滿국경을 횡단해서 一擊離脫(일격이탈)의 전법으로 공격해 왔다. 공산군의 공세에 대한 항공작전은 航空沮止(항공저지)와 空輸(공수)가 중시되어 全 소티數의 60∼80%를 점하게 되었다. 
 1951년 1월(중공군 제3차공세)에서 유엔 지상군이 37도선까지 후퇴하자, 유엔 공군은 일본의 규슈(九州)로 철수했다. 이에 공산군 측의 공군은 압록강∼청천강 사이의 空域(공역)에서 航空優勢(항공우세)를 이룩했다. 이 공역을 유엔 공군은 ‘Mig Alley(미그 골짜기)’라고 불렀다.
 
유엔 공군의 ‘목조르기’ 작전

 유엔공군은 Mig의 증강에 맞서 F86을 大邱(대구)까지 진출시켰지만, 압록강까지의 추격은 가능하지 않았다. 1951년 1월24일, 리지웨이 미 8군사령관은 파트리지 미 제5공군사령관과 T6정찰기로 약 2시간에 걸쳐 前線(전선)을 시찰했다. 그 결과, ‘선더볼트(우뢰) 작전’을 발동한 것은 앞에서 썼다. 1951년 1월 하순에는 水原(수원)비행장, 2월10일에는 金浦(김포)비행장을 탈환했지만, 철퇴시의 파괴로 사용 불능이었다. 이에 응급수리로 수원비행장부터 제트기가 작전 가능하도록 한 것은 3월6일이었다.
 국군과 유엔 지상군의 북상에 따라 유엔 공군도 한국 내 비행장으로 복귀, 압록강 주변 上空(상공)에서는 Mig와 F86 사이에 공중전이 벌어졌지만, Mig는 적극적인 도전은 자제했다. Mig의 적극 공격은 1951년 4월 이후의 일이었다. 51년 4월12일, 약 105기의 Mig가 공세를 취한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거론했다.
 휴전회담이 개시되었던 1951년 7월 이후, 지상전은 陣地戰(진지전)으로 변하고, 항공작전은 지상군의 北上(북상)에 기여하는 전략폭격 때문에 ‘스트랭글(목조르기·Strangle) 작전’이라고 불렸다. 스트랭글 작전의 주요 목표는 교통망으로 좁혀졌다. 파일럿들은 매일 철도 공격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철도에서 일한다”는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철도 공격의 효과는 서서히 나타나 공산군 측의 탄약·군량 결핍 상황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두만강 河口(하구)의 羅津港(나진항)은 소련으로부터의 보급항으로서 활기를 띄어 중요한 공격 목표였지만, 소련領을 誤爆(오폭)할 가능성이 있어 워싱턴은 공격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이에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나진 앞바다에 떠 있는 미 함정의 레이더 誘導(유도)로 폭격한다는 해결책을 워싱턴에 건의해, 허가를 얻은 다음에 폭격했다. 이것이 리지웨이와 맥아더의 차이였다. 맥아더는 필요성을 강조하는 나머지 실행 가능성 및 그 영향에 대한 설명을 워싱턴에 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트랭글 작전의 목표는 電源(전원)시설 및 灌漑用(관개용) 댐에도 확대되었다. 그 결과, 북한의 전력은 10%로 저하하고, 댐 下流(하류)에는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주민생활이 塗炭(도탄)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중공 및 북한 수뇌부는 아프기는 커녕 가려워하지도 않았다. 스탈린이 죽고(1953년 3월) 말렌코프 정권이 성립하지 않았다면 휴전회담의 타결은 더 지연되었을지도 모른다. 미 극동공군의 보고에 따르면 휴전 성립 때까지의 공중전에서 F86은 79기를 잃었다. 반면 Mig15는 격추 792기, 격추 예상 134기였다.   
  
대치… 戰線의 交錯과 후방의 정치파동

 1952년 6월에 들어 ‘포로교섭’이 정체상태에 빠질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공산군의 이동 및 집중이 활발해지고, 후방으로부터 前線(전선)으로 향하는 보급의 행렬이 늘어났다. 공세를 취할 조짐이었다. 그러나 공산군의 행동은 밤이나 비 오는 날에 한정되고, 통신은 有線(유선)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情報源(정보원)으로서의 포로가 필요했다.
 1952년 6월 초순, 미 8군의 이례적인 명령이 하달되었다. 前線(전선) 248km에 포진하고 있던 16개 사단에 대해 “포로를 획득하라. 1명을 붙잡을 때마다 100만 원의 상금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각 사단은 勇躍(용약·용감하게 뛰쳐나가는) 포로 획득 작전을 전개했지만, 포로를 붙잡으러 간 병사가 거꾸로 포로가 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제11사단장으로서 동해안의 南江(남강) 남안에 진지를 확보하고 있던 故 林富澤(임부택) 장군의 회고가 《朝鮮戰爭—韓國編》(사사키 하루다카 著)에 기록되어 있다.  林富澤(1919∼2001)이라면 먼저 그의 戰功(전공)부터 거론해야 할 것 같다.
 
 6·25 발발 당시, 임부택 중령은 春川(춘천) 정면의 방어를 맡았던 제7연대(제6사단 예하) 연대장이었다. 제7연대는 북한강 계곡을 따라 남하하던 북한군 제2사단을 사단 포병의 사격 및 보병의 육박 공격으로 수 차례 격퇴했다. 이에 북한군은 洪川(홍천) 방면으로 남하하던 북한군 제7사단(50년 7월에 제12사단으로 개칭함)을 春川 정면으로 돌려, 6월28일에야 간신히 春川을 점령했다.
 이로써 6월25일 중에 春川을 점령, 북한강과 남한강을 따라 西進(서진)해 서울 배후인 水原(수원)에서 북한군 1군단과 함께 국군 主力을 섬멸한다고 하는 그들의 작전계획을 크게 빗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북한군 제2군단장 金光俠(김광협) 중장은 군단참모장으로 降等(강등)당했고, 북한군 제2사단장 李靑松(이청송) 소장은 更迭(경질)되었다.
  북진 때인 1950년 10월26일, 임부택 대령의 제7연대는 楚山(초산)의 압록강에 제1번으로 도착,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아 李承晩 대통령에게 직송하기도 했다. 1960년에 임부택 소장은 제1군단장으로 승진했으나, 1961년 5.16 당시 그의 眞意(진의)가 ‘혁명주체’에 잘못 전해져 ‘반혁명혐의자’로 체포되기도 했고, 1963년 계급정년으로 예편했다. ‘護國(호국) 영웅’의 말년이 평탄치 않았던 셈이다. 전남 羅州(나주) 출신이다. 다음은  ‘포로 1명 획득 100만원’ 과 관련한 임부택 장군이 증언이다.   
   
<東海岸(동해안)의 南江(남강)은 강폭이 넓지는 않지만, 兩岸(양안)이 절벽으로 되어 있는 곳이 많고, 水深(수심) 1∼2m의 急流(급류)로서 겨울에도 얼지 않는 것으로 이름난 강이다. 따라서 對陣(대진) 간에 작은 충돌은 적었던 편이다.
 포로 획득은 쌍방이 산속의 동굴 진지에 들어간 상황에서는 유일의 情報源(정보원)이었다. 또 士氣(사기)를 유지하는 방편으로서도 포로의 획득이 장려되어 한 명을 획득하면 100만 원의 상금이 지급되었다. 또 사단에는 1개월 당 포로 획득의 의무 숫자 몇 명인가가 할당되었다.
 그래서 맹훈련을 쌓은 후 小隊級(소대급)의 획득대를 파견했지만, 적도 주의하고 있어 그다지 실적을 올리지 못했다. 한번에 2명을 잡은 일도 있지만, 4명의 희생자를 낸 것이었다. 그리하여 포로 획득작전은 시들해졌다.> 

 또 金城(금성)돌출부의 제6사단도 포로 획득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白仁燁(백인엽) 제6사단장은 친형이며 직속상관인 白善燁(백선엽) 제2군단장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호랑이나 사자를 붙잡는 것도 쉽지 않는데, 사람이 사람을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소. 안이한 기분으로는 헛되이 희생자만 늘어날 뿐이오. 공격하기 쉬운 장소를 선정해 공격하면 포로를 잡을 찬스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白善燁 군단장은 “그건 그렇다”고 수긍하면서 공격 지점과 공격 방법에 관한 구상을 물었다. 다음은 백인엽 사단장은, “金城 동남쪽과 그 동쪽 고지에 적의 前哨(전초)진지가 있지만, 골짜기 등의 지형으로 서로 협력하기가 어렵다. 이것을 노려서 기습하는 것이다. 후방에서 비슷한 고지를 선택해서 거기서 2주간 훈련하고 군단장이 ‘좋다’고 하면 실행하겠다”고 답했다.
 백인엽 제6사단장은 제2연대의 제2·제7중대와 混成(혼성)중대 및 정찰중대를 선정, 2주간 실탄을 사격하는 연습을 10회 실시했다. 공격방법은 黎明(여명) 돌격이었다. 시나리오는 밤중에 가만히 적진 가까이 숨어 들어가 있다가, 새벽의 어둠을 타고 不意(불의)에 기습을 개시하고. 적의 회복공격이 시작되면 彈幕(탄막)으로 저지한다는 것이었다.

 1952년 6월11일 밤, 공격부대는 가만히 최전선에 진출, 12일 새벽 0400를 기해 돌격을 개시했다. 예상 밖으로 적의 저항은 완강했지만, 0600에는 목표인 2개 고지를 탈취하고 적병 16 명을 붙잡았다. 1600만 원의 상금을 한꺼번에 번 셈이었다.
 적은 중공군 제12軍[군단] 제31師[사단] 제91団[연대]이었다. 그러나 반격은 예상보다 늦었다. 중공군이 탈환공격을 개시해 彈幕(탄막)에 포착된 것은 6월18일의 일이었다. 이로써 이 正面(정면)은 다음해인 1953년 7월에 중공군이 최후의 공세를 취할 때까지 1년여 동안 평온무사했다
 前哨據點(전초거점)의 쟁탈전으로는, 1951년 가을에 동해안의 月比山(월비산)을 둘러싼 전투 등이 벌어졌지만, 1952년 전반에는 잠잠했다. 그러나 휴전회담이 막다른 골목에 들어 중단되자 1952년 9월부터 11월에 걸쳐서 全전선에서 거점의 쟁탈이 시작되었다.

“개헌문제로 참모총장을 砲殺하면 利敵행위가 됩니다”

 1952년 초여름, 거제도의 포로폭동사건 및 공산권의 흑색선전에 의한 소위 ‘세균전 파동’ 등으로 휴전회담이 표류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의 政情(정정)도 점차 어수선해졌다. 헌법이 정한 초대 대통령의 임기가 1952년 8월에 끝나게 되어 있었다. 당시 대통령선거는 국회의원들에 의한 간접선거제였다.
 그런데 6·25동란 발발 직전에 실시된 5·30총선거(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여당의 의석은 4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따라서 국회에서의 간접선거로는 李承晩 대통령의 再選(재선)은 절망적으로 보였다.
 반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당시 절대적이었다. 헌법을 직선제로 개정하면 이승만 박사의 재선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헌법의 개정, 그것이 문제였다. 李 대통령은 계엄령 선포를 하면서 李鍾贊(이종찬) 육군참모총장에게 병력으로 반대파 국회의원들의 반대 활동을 봉쇄하도록 명령했다. 이종찬 총장은 政情(정정) 불안의 시기이기도 하고, 공비들의 활동도 輕視(경시)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계엄령 선포에는 따르겠지만, 정치적 목적에 병력의 사용에 대해선 거부했다.
 병력 사용은 군의 정치개입이고, 이승만派(파)에 대한 옹호는 군을 私兵化(사병화)한다는 논리였다. 李 총장은 제국주의 일본의 정치가 군부의 개입에 의해 파국의 길로 갔던 것을 보아온 만큼 단호하게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李 총장의 논리는 이러했다.
 
▲ 미국에게 戰局(전국) 전환의 의지가 없는 이상, 李 대통령이 아무리 반대해도 停戰(정전)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 그렇다면 군이 정치에 간여하는 길로 들어가는 것은 국가의 百年大計(백년대계)를 그르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수 차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李 총장은 병력의 사용을 거절했다. 그의 결벽성이 端的(단적)으로 드러난 예였다. 李 대통령은 격노했다. 李 대통령은 참모차장 劉載興(유재흥) 중장을 불러 흥분하면 늘 그렇듯이 손을 부르르 떨면서 嚴命(엄명)했다.

“참모총장이 대통령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통령은 국군의 최고사령관이고, 大元帥(대원수)이다. 참모총장이라 해도 大元帥(대원수)에 항명하면 극형에 처한다. 즉각 砲殺(포살)해서 全軍에의 본보기로 하라!”

유재흥 참모차장은 이렇게 李 대통령을 설득했다

<전쟁 중인데, 정치와 관련해서 참모총장을 砲殺(포살)하는 것은 적을 이롭게 하고, 외국의 신용을 잃으며, 군의 士氣(사기)를 저하시키는 것 또한 심대합니다. 만약 이 때문에 전쟁에 진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한국 자체가 없어지는 겁니다. 大局的(대국적) 견지에 서서 정치적 명령과 군사적 명령을 峻別(준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군이 정치에 간여하는 前例(전례)를 만들면 日帝(일제)를 답습하는 것이 됩니다. 또 軍은 제1선에서의 대치와 공비 토벌에도 버거운데, 여기서 정치적 用兵(용병)을 감행한다면 그 미치는 영향은 計測(계측)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軍에는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李 참모총장은 대통령 각하에게 대드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 각하로부터 부하된 군사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他意(타의)가 있을 리 없습니다. 이런 李 총장의 고충을 살펴 주십시오.>

 李 대통령은 처음엔 폭발할 듯했지만, 劉 참모차장의 간절한 진언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 드디어 표정이 온화해졌다. ‘砲殺(포살)’ 지시는 취소되었다.  결국, 계엄령 하에 1952년 7월3일 국회에서 직선제 헌법개정안을 가결시키고, 8월9일에 직접선거를 통해 李 대통령은 再選(재선)되었다.
 이종찬 총장은 사표를 제출해 1년간의 미국 유학의 명목으로 출국하게 되었다. 총장의 교대는 1952년 7월23일 이뤄졌다. 신임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된 인물은 서열을 건너 뛰어 제2군단장 白善燁(백선엽) 중장이었다. 그동안의 戰績(전적)에 의해 미군이 절대적으로 선호했던 장군이었다. 6·25 동란 중 ‘연대장으로서 제1’이 林富澤(임부택)이라면 ‘사단장으로서 제1’은 백선엽이었다.     

격렬한 고지 쟁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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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고지 쟁탈전의 위치


 휴전협상이 반공포로 5만여 명의 취급 방법을 둘러싸고 1년간이나 표류하고 있는 사이, 제1선에서는 유엔군 측만으로 1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반공포로 5만 명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그 2배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는 것은 이 문제의 복잡성을 말해 주고 있다.
 1952년 8월20일, 중공의 周恩來(주은래) 수상은 모스크바를 방문, 스탈린에게 한국전쟁의 전황을 간략하게 보고 했다. 陣地戰(진지전)으로 이행해 전선이 交錯(교착)해 있다는 것, 전력은 互角(호각), 양측 모두 대규모 작전은 어렵게 되었다는 것 등이었다.
 스탈린은 周恩來의 말허리를 끊고 “미국인은 포로의 귀환에 관심이 없는 것인가? 국제법대로 포로를 귀환시키면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을…”이라며 휴전회담 중 가장 난제에 대해 언급했다.

 이 시점, 스탈린은 한국전쟁의 휴전을 바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중공이란 두 호랑이가 서로 물고 뜯는 싸움 끝에 둘 모두를 피폐시키겠다는 책략의 구사였던 것이다. 실은 중공의 毛澤東(모택동)도 終戰(종전)을 바라지 않았다. 國共內戰(국공내전)에서 항복한 舊국부군  병력 수백만 명의 ‘소비처’가 필요했던 것이다. 공산권에서 휴전에 안달이 난 것은 6·25 남침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김일성이었다.
 공산군은 52년 9월18일부터 중공군 7개군(군단), 북한군 2개 군단을 동원해 대규모 반격작전에 나섰지만, 그것도 휴전을 앞둔 고지 쟁탈전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유엔군은 이에 대해 반격으로 응수해 泗川江(사천강), 不毛(불모)고지, 首都(수도)고지, 白馬(백마)고지, 狙擊稜線(저격능선), 크리스마스高地, 月比山 등에서 격렬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철의 삼각지’ 쟁탈전- 백마고지 전투

 1952년 10월의 高地戰(고지전) 중에서 규모도 가장 크고 격렬했던 것이 平康(평강)-鐵原(철원)-金化(김화)를 있는 지역의 전투였다. ‘鐵의 삼각지’라고 불리는 이 지역의 고지는 엄청난 포탄을 맞아 민둥산이 되고, 심지어는 산의 모양까지 변해 버렸다. 그 대표적 전투가 철원 西部의 白馬高地(백마고지) 전투와 김화 동북쪽의 狙擊稜線(저격능선) 전투이다.
백마(395)고지 전투의 승리는 세계전사에도 사례가 드믄 高地방어전의 白眉(백미)로 회자된다. 1952년 10월6일부터 15일까지의 10일간에 걸친 격전 끝에 金鍾五(김종오) 준장의 국군 제9사단이 격전 끝에 중공군 3개 사단을 완전히 물리쳤다.
 중공군이 백마고지를 노린 이유는 전략적 이점 때문이었다. 백마고지는 행정구역상 강원도 철원군 신명리의 야산으로, 철원읍 서북방 12km 지점의 효성산(619고지) 남쪽 끝자락에 매달려 있는 해발 395m의 고지다. 395고지는 6·25전쟁 전까지 이 일대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1951년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될 때부터 이 일대에서 군사적 접촉이 계속되면서 언론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 지역은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의 꼭지점 중 하나인 철원 서남쪽의 肩部(견부)를 구성하는 요충이다. 肩部(견부)란 전방 및 측·후방을 잘 관찰할 수 있고. 적을 공격·저지하기 좋은 위치를 말한다.
 만약 적이 395고지를 점령하면 철원평야가 적의 감제下에 놓이게 될 뿐만 아니라 중부지역에 배치된 아군의 병참선인 3번 도로를 비롯한 보급로들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감제란 주변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점에서 관측 또는 사격에 의해 적의 활동을 방해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395고지를 놓고 피아간에 12차례의 공방전을 벌여 일곱 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大혈전을 펼친 것이다.      

 2012년 말 이후 서울에서 87km 떨어진 철원읍 大馬里(대마리)의 ‘백마고지역’까지 京元線(경원선) 열차가 연장 운행되고 있다. 경원선은 서울역에서 ‘DMZ-train 평화열차’를 타면 청량리역-의정부역-동두천역-한탄강역-연천역-신탄리역을 거쳐 중단점인 백마고지에 도착한다. 백마고지역을 이용한 관광객은 대상으로 셔틀버스를 이용한 안보투어가 실시되고 잇다. 출발시간은 10시40분과 13시30분(매주 화요일과 어린이날, 명절연휴 제외) 코스는 백마고지역-제2땅굴-평화전망대-월정리역-백마고지역으로 약 3시간 소요된다. DMZ 안에 있는 백마고지는 셔틀버스를 이용한 안보투어에 포함되지 않는다. 
 백마고지 역에서 백마고지 위령비와 기념탑(철원읍 판교리)은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백마고지 기념탑에서 나지막한 산길을 10분 쯤 오르면 DMZ 내의 백마고지(395고지)가 보인다.
 백마고지 우측으로 펼쳐진 고지가 북한의 대성산(530m)인데, 敵 연대 OP(관측소)가 들어서 있다. 백마고지와 대성산 사이로 보이는 새부리 모양의 고지가 북한의 고암산(780m)이다. 고암산은 백마고지 전투 때 金日成(김일성)이 직접 와서 督戰(독전)했던 곳이라 해서 ‘金日成 고지’라 불린다. 백마고지 전투의 패전으로 드넓은 철원평야를 잃은 것에 대해 金日成은 매우 통분해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395고지는 전투 당시 피아의 포탄이 떨어져 하늘에서 산의 모습을 볼 때 한 마리 白馬(백마)가 누워 있는 듯하다 하여 ‘白馬고지’라는 이름을 얻었다. 포격으로 인해 산 높이가 1m 가량 낮아졌다고 한다.
 중공군이 5만5000여 발, 아군이 22만여 발의 포탄을 발사함으로써 총 27만5000여 발의 포격이 이 작은 고지에 집중됐던 것이다. 또 유엔군의 항공기도 756회나 출격해 폭격을 가함으로써 395고지 정상에는 풀 한 포기 남지 않았다. 395고지 좌측에 보이는 야트막한 산이 266고지로서 백마고지 전투 당시 제9사단장 金鍾五 준장이  전방지휘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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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오 장군
金鍾五(1921∼1966)

김종오 장군은 충북 淸原(청원) 출신. 1944년 연희전문대 문과를 졸업하고, 학도병으로 日軍 소위가 되었다. 1946년 1월 軍英(군영)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군번 31번). 50년 6월10일 제6사단장으로 임명된 지 불과 15일 후에 6·25 남침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예하 제7연대(林富澤 중령)가 춘천방어전에서 善戰(선전)한 데다 제2연대(함병선 중령)과 19연대(민병권 중령)를 기민하게 운용, 춘천∼홍천 전선을 6일간 확보하고 북한군 제2·제7사단에 대타격을 가해 水原으로 진출해 북한군 제1군단과 함께 수도권의 남북에서 국군을 섬멸하겠다는 그들의 당초 작전계획을 변경시키지 않으면 안 되게 했다. 1960년 육군참모총장, 1961년 합참의장(대장)을 역임하고 1965년 예편했다.


 백마고지는 원래 ‘大馬里 뒷산’으로 불리는 無名고지였다. 그러나 휴전협상이 진행되던 가운데 寸土(촌토)를 다투면서 피비린내 나는 격전장으로 바뀌었다. 1952년 10월6일 중공군의 대공세로 혈전이 시작되었다. 
 중공군 38軍(국군의 군단에 해당함)은 병사들에게 배갈을 마시게 하여 人海戰術(인해전술)을 구사했다. 여기서 중공군은 1만4천여 명, 국군도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중공의 제38군은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해 재정비에 착수했고, 국군 제9사단도 재편성이 필요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백마고지의 혈전에 대해 “왜 이렇게 작은 고지를 놓고 그렇게 많은 인명과 물자 투입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전략·전술적 중요성이다. 서울로 연결되는 기계화부대의 기동로(3번 국도)와 동서로 연결되는 주요도로가 모두 이곳에서 교차한다. 만약, 아군이 이 고지를 상실했다면 철원평야 전체와 주요 도로를 모두 포기하고 약 3∼4km 후방으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둘째,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가 당시 유엔군의 전체적 작전 주도권 확보에 크게 기여했는 점이다. 1952년 6월부터 全 전선에서 전개된 고지 쟁탈전에서 아군은 대체적으로 불리했다. 그러나 국군 제9사단은 중공군 제38군이 노린 중부전선 요지를 지켜냄으로써 인접 ‘저격능선’ 전투에서 아군이 주도권을 장악해 선제공격을 시도했고, 유엔 측은 재개된 휴전에서 공산 측에 대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셋째, 국군의 명예를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1952년 중반부터 본격화된 국군의 증강 발전에 기여했다. 국군 제9사단 장병들은 1951년 5월 현리전투의 패배로 인한 치욕을 씻는 복수전에 성공했다. 미군 지휘관들은 국군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해 한국군의 증강계획에 부정적인 선입견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철의 삼각지 안보투어

 수복지구인 철원군은 현재의 행정구역이 철원·東松(동송)·葛末(갈말)·金化(김화)의 4개 읍 등으로 구성되었다. 민간인 통제선 바로 남쪽의 철원읍과 동송읍은 시가지가 이어져 있어 하나의 생활권이다. 철원읍은 수복지구를 배려한 행정적 편제의 읍일 뿐으로 인구는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2012년 말에 경원선 철도의 중단점이 신탄리역(연천군)에서 白馬高地(백마고지)역까지 연장되어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되는 곳이다.
 수복 후 가장 일찍 주민들이 정착한 곳은 동쪽의 갈말읍이다. 이곳이 新鐵原(신철원)이라 불리는 군청 소재지이다. 행정구역상 철원읍에 속하는 백마고지는 군사분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의 DMZ(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해 있다. 갈말읍에서 다시 5km 쯤 북상해 463번 지방도로로 길을 바꿔 2km쯤 달리면 漢灘江(한탄강) 위에 한탄대교가 걸려 있다. 이 다리를 건너 孤石亭(고석정) 광장에 승용차를 주차시키고, 이곳 안보관광사업소에 들러 오후 2시30분에 출발하는 ‘철의 삼각지 견학’을 신청했다.
 한탄강 중류의 고석정은 조선 明宗(명종) 때의 義賊(의적) 임꺽정이 한동안 은신했던 곳이라 한다.오후 2시30분, 안내 공무원의 인솔로 ‘철의 삼각지 안보견학’을 위해 광장을 출발했다. 견학단은 단촐해 중국인 청년 30여 명이 탑승한 관광버스 1대와 그 뒤를 따라가는 개인 승용차 3대가 전부였다. 주말(토·일요일)에는 개인차량의 이용은 ‘불가’이고, 그 대신에 요금 8000원을 받는 셔틀버스만 다닌다. 마식령 산맥과 廣州山脈(광주산맥)에 둘러싸인 철원은 일교차가 심한 기후의 영향으로 이곳 돼지고기의 육질이 매우 부드럽다.
1954년부터 60여년간 북한은 공격용 땅굴 뚫어 왔다

뼈와 살이 녹아내린 아이스크림 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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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아이스크림 고지(삽슬봉)

 제8통제소를 지나 土橋(토교)저수지를 지나 남방한계선에 위치한 제2땅굴을 45분쯤 견학했다. 견고한 화강암층의 지하 50~160m 지점에 있는 이 땅굴은 총연장 3.5km,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1.1km를 파내려 왔다. 그 의도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국군 제1선 부대의 뒤통수를 치겠다는 것이다. 그 규모는 높이 2m의 아치형 터널로서 대규모 침투가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철책선 지대의 이 땅굴은 국군 초병이 경계근무 중 땅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듣고, 시추작업으로 땅굴 소재를 확인한 후 수십일 간의 작업 끝에 발견했다. 적의 기습용 땅굴이다. 
 제2땅굴을 뒤로 하고 東松(동송)저수지에 이르렀다. 土橋(토교)저수지와 동송저수지는 모두 대규모 人工(인공) 저수지다. 철원군은 많은 땅이 북한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수지 등 水利(수리)시설이 보강되고 민간인통제선 안으로도 출입 영농이 허용되어 강원도 제1의 곡창지대가 되었다. 경지 중 논의 비율이 거의 85%에 이르며 쌀 생산량이 강원도 전체 생산량의 20%에 가깝다.

 특히 철원의 ‘오대쌀’은 휴전 이후 인적이 끊긴 비무장지대에서 흘러드는 청정한 물과 해발 250m 고원의 신선한 바람, 기름진 황토흙, 깨끗한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존된 무공해 지역에서 생산되어 밥맛이 좋다. 농가의 가구당 耕地(경지)면적이 넓고, 영농의 기계화도 일찍 추진되었다. 서울과의 교통이 편리한 갈말·동송 지구에는 낙농·양돈·양계가 성하다. 동송저수지 남쪽에서는 ‘아이스크림 고지’가 指呼之間(지호지간)이다. 이것은 “맛있는 아이스크림∼∼”이 아니다. 6·25 때 피아간에 처절한 쟁탈전과 포격이 극심해 산이 마치 아이스크림 녹듯 흘러내렸다 해서 붙은 별명이다.
 본래는 이 산 밑에 삽송리라는 마을이 있어 삽송봉(또는 삽슬봉)이라 불렸다. 초소를 조금 지나 모노레일을 타고 철원 평화전망대로 올라갔다. 철책선 너머 DMZ(비무장지대)에는 泰封國(태봉국)의 都城(도성) 터가 보인다. 鐵原(철원), 바로 ‘쇠둘레’는 후삼국의 최강으로 군림했던 弓裔(궁예·?~918)가 도읍을 했던 고을이다.
 궁예는 918년 부하장수였던 王建(왕건)의 쿠데타에 의해 왕위를 빼앗겼는데, 사서에서는 ‘失性(실성)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왕건이 바로 高麗(고려)의 태조이다. 전망대에선 평강 高原(고원)과 북한 선전마을도 볼 수 있다.

 月井里驛(월정리역)으로 이동했다. 효성 깊은 처녀가 살았던 ‘달우물마을’이라는 뜻의 月井里는 분단 전에는 경원선 철도가 통과하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지금은 100여m의 철로와 부식된 기차의 몸체만 나뒹굴고 있다. 그곳 남방한계선으로 연결된 통로엔 국군 제6사단의 靑星(청성, 푸른 별) 마크가 붙어 있다. 제6사단이라면 6·25 발발 초기 春川(춘천) 전선에서 잘 싸웠고, 북진 때는 압록강변의 초산까지 올라가 그 강물을 수통에 담아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부대이다.  월정리역에서 내려와 제5통제소 앞에서 안내 공무원과 헤어졌다. 민간인통제선 밖으로 나온 것이다. 철책선 남쪽에 있는 백마고지 전적비와 기념관(철원읍 大馬里)을 답사했다.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중공군 1만4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국군도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백마고지전적비와 기념관이 있는 나지막한 무명고지에 올랐던 오후 5시 무렵, 적의 GP에서 이른바 ‘핵 보유 강성대국’을 자랑하는 선전선동 방송이 시끄럽게 흘러나오더니만, 어느 결에‘장군님 은덕’ 운운으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10분 정도 걸어 무명고지의 북단에 이르면 신명湖 좌측에 역곡천이 보이는데 그 너머가 백마고지이다. 백마고지 우측으로 펼쳐진 고지가 북한의 대성산(530m)인데, 敵(적) 연대 관측소가 위치하고 있다.
 백마고지와 대성산 사이에 보이는 새부리 모양의 고지가 고암산(780m)이다. 고암산은,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김일성이 직접 전투를 지휘했던 곳이라 하여 ‘김일성고지’라고 불린다. 백마고지 전투의 패배로 드넓은 철원평야를 빼앗긴 데 대해 김일성은 분통을 터뜨린 것으로 전해진다. 백마고지 좌측에 보이는 얕으막한 산이 266고지로서 백마고지 전투 당시 제9사단장 金鍾五(김종오·훗날 육군참모총장 역임·1966년 별세) 준장이 전방지휘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촌토를 다투면서 피비린내 나는 격전장으로 변했다. 1952년 10월6일 중공군의 대공세로 혈전이 시작되었다. 이후 열흘 간 공방전을 벌이는 가운데 스물네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 중공군 38軍은 병사들에게 배갈을 마시게 하여 人海戰術(인해전술)을 감행했다. 여기서 중공군은 1만4000여 명의 전상자를 내어 2개 사단이 완전히 와해되었다.

丁一權을 제2사단장으로 格下시킨 뜻
 
‘철의 삼각지’에서 전개된 또 하나의 대표적 전투가 狙擊稜線(저격능선)의 싸움이다. 중공군 측은 이것을 ‘上甘嶺(삼감령)의 전투’라 부르며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다음은 《中國軍隊實戰實錄4》에서 발췌한 관련 기록이다.
 
<韓美軍은 1952년 10월14일부터 병력 6만 명, 포 320門, 전차 180여 대를 투입하여 上甘嶺(상감령)에 공격을 개시했다. 이에 대해 지원군(중공군)은 4만의 병력과 30여門의 포를 투입했다. 43일간의 싸움에서 韓美軍은 겨우 3.7 km²의 지역에 190만 발의 포탄과 5000개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기 때문에 山頂(산정)에서 1m 이상의 土石(토석)이 무너져 진지는 모두 파괴되었다. 지원군(중공군)은 탄약·식량이 결핍된 상황에서 땅굴을 이용해 완강하게 싸우고, 수백 회에 이르는 유엔군의 공격을 저지, 유엔군 측 병사 2만5000 명을 섬멸하고, 포 61門, 전차 14 대를 파괴했다. 이에 의해 근대장비를 자랑하는 적의 진공을, 땅굴을 이용해서 저항·반격한다는 固守(고수)방어작전의 경험을 쌓았다.>

 저격능선 전투라면 참모총장 직책에서 제2사단장으로 격하된 시절의 丁一權(정일권) 장군이 치른 고지쟁탈전이었다. 1951년 7월에 육군참모총장의 직책에서 물러난 정일권 중장은 미 참모대학에서 1년간 유학한 뒤 1952년 7월 하순에 귀국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보직은 제2사단장이었다. 당시 사단장은 준장, 군단장은 소장의 보직이었던 만큼 그에게 사단장은 3단계의 格下(격하)를 의미했다.
 이 人事(인사)에 대해 미군의 SOP(관리운용절차)에 따른 조치였다는 해명도 있었다. 미군에서는 진급·보직의 요건으로서 각급 부대장의 경력을 순차적으로 거쳐야만 했다. 즉, 대대장의 직에서 합격하지 않으면 연대장으로 진급할 수 없고, 연대장을 잘 해야 사단장이 되고, 사단장을 잘 해야 군단장 자격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일권의 부대장 경력은 제1연대 창설시의 중대장과 光州 주둔 제4연대장(1946년 5.월25일∼1947년 1월28일) 뿐으로, 나머지는 모두 육본 중추부에서 근무해 지휘관의 경험이 부족했다. 

 이에 밴플리트 8군사령관은 “丁 장군을 보다 큰 인물로 키우기 위해서는, 본인은 기분이 나쁘겠지만, 사단장으로부터 순차적으로 상급의 직책을 경험시키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이 조언을 李鍾贊(이종찬) 당시 육군참모총장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인사권자인 李承晩 대통령에게 상신했다.          
 그러나 이런 경위야 어떻든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던 정일권 중장은 군인을 그만둘 작정으로 귀국 후 鎭海(진해)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그때 새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던 白善燁(백선엽) 중장은 진해로 달려갔다.
 “형님! 국가를 위해, 軍을 위해 참아 주십시오”
白善燁 총장은 정일권 장군의 奉天군관하교 4期(기) 후배이다. 그는 정일권 장군에게 이번 인사의 배경에 대해 제2사단장→미 제9군단 副군단장→국군 제2군단장으로 가는 예정된 코스에 따른 것이라 설명하고, 사퇴의 번의를 촉구했다. 이리하여 정일권 중장은 金化(김화) 동쪽에 주둔하고 있던 제2사단에 부임했지만, 곧 최대의 격전 중 하나인 저격능선의 死鬪(사투)가 시작되었다. 

27번 뺏기고 28번 탈취한 死鬪

제2사단의 最좌익 제32연대의 북방 5km에 五聖山(오성산·1062m)가 솟아 있다. 오성산으로부터 남으로 흐르는 稜線(능선·산등성이)의 남쪽 기슭에 金化(김화)가 있다. 제32연대의 진지는 그 능선의 동남단에 있는 539고지 일대에 매달려 있는 모양이다.
 최전선 북방 500∼600m의 연속된 봉우리에 狙擊稜線(저격능선·Sniper ridgeline)이라고 명명되는 520∼540m의 高地群(고지군)이 있었다. 그것이 중공군 제15軍(군: 군단) 예하 제133단[연대]의 前哨陣地(전초진지)로서 피아 제1선 간의 거리는 300m 정도였다. 그야말로 서로 ‘코와 코를 맞댄 형국’이었다. 또 국군 제2사단 왼쪽에 위치한 미 제7사단의 우측 前面에는 같은 오성산으로부터 흐르는 598고지(三角高地라고 명명됨)가 있었다. 이것이 중공군 제135사단의 前哨陣地(전초진지)로서 미군과 역시 300m의 거리를 두고 서로 대치했다.
 저격능선 바로 서쪽에 붙어있는 삼각고지는 웨인 C. 스미스 少將의 미 제7사단이 같은 시각에 공격해 나갈 것이었다. 미군들은 삼각고지를 ‘제인 러셀 高地’라 했다. 當代(당대)의 육체파 여배우 겸 가수인 제인 러셀의 乳房(유방)을 생각나게 하는 능선이라 하여 그리 명명되었다고 한다. 

 1952년 가을철로 들어서면서 중공군과 북한군이 대대적인 진지전을 전개하자, 국군과 유엔군 측은 위력을 과시해 전장의 주도권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지형을 대충 살펴보면 국군 제2사단의 左翼(좌익)과 미 제7사단의 右翼(우익)이 凹(요)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또 진지의 縱深(종심)도 얕아 방어上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었다.
 그러나 金化(김화) 북방의 저격능선과 삼각고지를 탈취하면 아군의 제1선은 거의 直線(직선)으로 되고, 각 진지도 縱深(종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또 적의 前哨(전초)를 탈취하는 것에 의해 적의 主저항선을 ‘알몸’으로 만들 수 있고, 또한 휴전선 설정 후 軍事分界線(군사분계선)으로부터 피아 모두가 2km씩 후방으로 물러날 것을 고려하면 아군에게 극히 유리하게 되는 셈이었다. 미 제9군단장은 이들 前哨據點(전초거점)의 탈취를 명했다.            

 1952년 10월14일 새벽 4시30분. 1초의 어김도 없이 미 제9군단의 16개 포병대대가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30분간에 걸친 공격준비사격이었다. 제32연대장 柳根昌(유근창) 대령은 제3대대를 基幹(기간)으로 하는 4개 중대를 병렬, 30분 후인 새벽 5시 정각에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高地群(고지군)의 北端(북단) Y고지까지 탈취했다.
 그런데도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적에게 교란·압도된 끝에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세를 再정비한 제3대대는 이날 여러 차례에 걸쳐 Y고지를 탈취했지만, 그것의 확보는 역시 불가능해 보였다.
 다음날인 10월15일, 제17연대 제2대대가 공격, 全목표를 탈취하고, 제32연대 제3중대가 최북단의 Y고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또다시 실패였다. 땅으로부터 솟아오른 것인지, 하늘로부터 내려 온 것인지는 그때는 몰랐지만, 그날 밤에 아군은 즉각 격퇴당하고 말았다.

27번 빼앗기고 28번 빼앗았지만…

이렇게 저격능선의 쟁탈이 계속되었지만, 10월30일 정일권 사단장은 제32연대의 主力으로 공격케 하여 드디어 이 쟁탈전에 마침표를 찍었다. 중공군은 오성산의 봉우리를 타고 약 2개 대대로써 반격했지만, 미리 준비하고 있던 火網(화망)에 걸려 大타격을 입고, 저격능선의 탈환을 체념한 것 같았다. 前哨據點(전초거점)의 쟁탈전으로서는 손꼽히는 격전 중의 하나인 이 전투에 대해 당시의 제2사단장이었던 정일권 장군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취하는 건 간단했다. 累計(누계)로 27번 빼앗기고 28번 탈취했다. 局地戰(국지전)에서는 가장 격전이었다고 생각한다. 戰場(전장)은 바위산 투성이로 참으로 처절한 전투였는데, 제32연대장 柳根昌(유근창) 대령 이하 모두가 실로 잘해 주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사단의 정보참모 文重燮(문중섭) 중령의 활약이었다. 처음엔 별 희생도 없이 뺏었던 고지를, 왜 큰 손해를 입고 격퇴당하는지, 그 이유를 파악하지 못했다. 각종 砲(포)로 장시간 포격해 제압하고, 보병은 포병의 최종탄에 뒤따라 돌격했다. 全고지를 점령하면 주위에 철통같은 彈幕(탄막)을 쳤다. 그러나 역습을 받은 모습도 없는데, 大손해를 입고 격퇴당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땅굴 파기에 뛰어난 중공군이 땅굴에 숨어 있다가 역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문중섭 중령에게 조사를 시켰다.
 문중섭 중령은 제1선과 함께 돌격해 땅굴의 입구를 찾아냈다. 그리고 땅굴 안을 제압, 포로들을 붙잡았다. 포로는 이렇게 말했다.
 “중공군의 3개 사단이 輪番(윤번)으로 방어하고 있다. 유엔군의 포격이 시작되면 땅굴 안에서 손해를 회피하고, 밤이 되면 땅굴로부터 나와 머리 위의 한국군을 격퇴하고 있었다”     
 역시 예상했던 적의 땅굴 戰法(전법)이었다. 그래서 공격 병력을 늘려 땅굴로부터의 역습에 대비했다. 땅굴 입구를 찾아내 하나하나 掃討(소토)했다. 이것으로 결말이 난 셈이지만, 나도 땅굴 속에 들어가 보고 놀랐다. 땅굴의 입구는 4∼5개뿐이었지만, 그 안은 개미의 집처럼 四通八達(사통팔달)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제2사단 왼쪽의 미 제9군단 예하 제7사단은 大손해를 입었으면서도 불구하고 삼각고지의 확보에 실패했다. 비명을 올린 미군은 나의 제2사단에게 삼각고지를 맡아달라고 했다.>

 
저격능선 전투  당시 제2사단의 정보참모(중령)였던 문중섭 장군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는 저격능선에서 중공군의 땅굴진지를 처음 수색해낸 인물이다. 

<백마고지와 저격능선이 ‘철의 삼각지대’에서 한국군의 용맹을 떨친 戰場(전장)에 틀림없지만, 백마고지 전투는 우리 측의 前哨(전초)진지를 중공군이 뺏으려 했다가 실패했던 싸움이고, 저격능선 전투는 중공군의 前哨진지를 우리가 탈취한 싸움인 만큼 성격이 다르다.
 저 바위투성이의 고지는 丁一權(정일권) 장군의 진두지휘와  비범한 着想(착상)이 없었다면 확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땅굴을 수색할 때는 눈을 감고 기관총을 쏘면서 안으로 들어갔지만, 누구도 그런 시설을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또 미군의 화력지원도 획기적이었는데, 이는 丁 장군의 聲望(성망)에 힘입은 것이라고 느꼈다.>

 
다시, 저격능선 전투에 대한 丁一權 장군의 회고이다.  
  
<제32연대장은 작은 몸매에 다부지기로 소문난 柳根昌(유근창) 대령이었다. 중공군의 牙城(아성) 오성산은 순식간에 초연을 뒤집어쓰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공격 제1선에서는 申大均(신대균) 소령의 제3대대가 5시 정각의 공격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격개시선은 김화 동북쪽 4km의 葛洞(갈동)이었다. 첫 공격목표인 ‘돌바위 능선’을 바로 올려다보는 산록이었다. (중략)
 예측대로 중공군의 저항은 완강했다. 최종 공격목표인 오성산까지의 여러 능선에 4개 사단을 깔아 놓고 있었다. 전부가 동굴[땅굴]진지였다. 중공군은 산악전에 능하다. 특히 박격포와 수류탄을 잘 사용한다. 그러나 아군에게는 우세한 野砲(야포)가 있었다. 더구나 공군의 근접지원을 받을 수가 있었다.
 공군의 근접지원은 절대적이었다. 참모총장 때에는 자주 볼 수 없었던 전투장면을 실제로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중략) 공군력 없이는 지상전의 주도권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아군은 火力(화력)이 우세하고, 중공군은 병력이 우세하며 地形(지형)도 유리했다. 전투는 낮과 밤을 이어가며 치열해졌다.
 봉우리 하나하나 아군이 점령하면,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적군이 역습해 왔다. 코와 코를 맞대는 근거리에서 총탄이 날고 수류탄이 터졌다. 총검과 야전삽으로 맞붙어 격투하는 백병전이 다반사였다. 고지의 山勢(산세)는 특이했다. 몸 숨길 풀 한 포기도 없이 밋밋한 돌산이 많았다. 최선봉 돌격분대는 깊은 골짜기를 때때로 거슬러 올라야 했다. 50m 안팎의 직선거리 어간에 적진이 마주 보이는데도 동굴진지까지 돌입하려면 깎아지른 벼랑을 포복해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중략) 戰果(전과)는 컸다. 포로 72 명, 사살 1만4795 명이었다.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공격목표인 저격능선을 확보한 것이다. 포성이 잠잠해진 것은 1952년 11월20일이다. 무려 42일간에 걸친 공방전이었다. 이리하여 前線에서는 전투를 반복하면서 (휴전)교섭은 중단된 채로 세 번째의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 >

 丁一權 중장은 저격능선 전투 직후 사단장으로서 합격점을 받고, 당초 예정대로 미 제9군단의 副군단장으로 전보되었다. 그의 후임(제2사단장)에는 姜文奉(강문봉) 소장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정일권 중장은 1952년 11월 국군 제2군단장이 되었다. 그러나 저격능선은 53년 7월의 휴전을 앞두고 감행된 중공군의 공세로 피탈되었다.   


康文奉, “1개 고지 탈취 위해 더 이상 피 흘려선 안 돼”

 저격능선 좌측의 삼각고지(제인 럿셀 高地)는 미 제7사단이 40여회에 걸쳐 쟁탈전을 벌였지만, 탈취하지 못했다. 더욱이 매일의 사상자가 200 명을 웃도는 것을 안 미국의 신문들은 ‘불필요한 희생’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여기서 공격을 멈추면 이제까지의 희생이 의미 없는 것으로 될 뿐만 아니라 공산 측에게 절호의 선전 자료로 되고 만다. 이쪽의 손해도 적지 않지만, 상대는 이미 여러 배의 손해를 입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미 제9군단은 저격능선을 탈취한 바 있는 국군 제2사단에게 삼각고지의 공격을 맡겼다. 국군 제2사단은 미 제7사단과 같은 火力(화력) 지원을 받으며 기세 좋게 공격했다. 미군이 못 하는 것을 국군이 빼앗아 보이겠다는 傲氣(오기)였다. 3일간 공격으로 여러 차례 고지를 탈취했지만, 그때마다 큰 손해를 입고 물러났다.
 이에 국군 제2사단에 새로 부임한 姜文奉(강문봉) 사단장은 獨斷(독단)으로 3일 만에 공격을 중지했다. 이유는 “1개 고지 확보를 위해 이 이상 피를 흘리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미 제9군단장은 재삼 독촉했지만, 姜 사단장은 군법회의 회부를 각오하고 완강하게 불응했다. 그로 인해 테일러 8군사령관에게 제소를 당했지만, 테일러 8군사령관은 “무리도 아니다”라며 공격 중지를 승인하고, 그의 명령불복종을 不問(불문)에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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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봉 장군
姜文奉(1923~1988)

필자는 維政會(유정회) 소속 9대 국회의원이던 강문봉(1923∼1988) 장군과 몇 번 만났는데, 秀才型(수재형) 군인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부드러운 얼굴線과는 달리 파란만장의 삶을 산 그는 함경북도 부령에서 태어났다.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해 滿洲國 皇帝賞(만주국 황제상)을 수상하고, 그 특전으로 일본육사 59기로 편입해 수학 중이던 1945년 8월15일 日帝의 패전과 동시에 예정일을 앞당겨 졸업했다.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의 개교에 따라 입교해, 1946년 1월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되었다(군번 17번). 정일권 參謀副將(참모부장)-강문봉 作戰局長(작전국장)의 콤비는 창설기 육군을 사실상 주도했다. 강문봉은 이론과 실행력에서 拔群(발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6·25 남침전쟁 발발 직전, 그는 미국 유학을 위해 出發港(출발항)인 부산으로 내려가 있었다. 6월28일, 그는 水原(수원)으로 내려온 육본에 달려가 육본 作戰局長(작전국장)으로 再임명되었다. 1951년 4월, 백선엽 장군의 후임으로 제1사단장 직을 인계받아 중공군의 서울 포위 공격을 막아내는 공적을 세웠다.
1951년 6월∼1952년 7월 정일권 장군과 함께 미국에 1년간 유학을 하고, 유학에서 돌아와 제1군단 부군단장 → 제2사단장 → 1953년 제3군단장(중장)을 거쳐 1954년 제2군사령꽌이 되었다.
제2군사령관 재임 중이던 1956년 1월, 강문봉 중장은 특무부대장 金昌龍(김창룡) 소장 암살을 배후에서 조종한 죄목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이때까지의 戰功(전공)과 미군의 助命(조명)운동으로 減一等(감일등)되어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李 대통령은 사건 직후 김창룡 소장을 중장으로 추서했고, 빈소에 직접 찾아가 조의를 표했다.
1960년 4.19혁명 후 그는 특사로 출옥했다. 1963년 제1야당 民政黨(민정당) 전국구 의원(6대 국회)으로 정계에 入門(입문)했고, 1967년 여당인 共和黨(공화당)에 입당했다. 그 후 駐스웨덴·駐스위스 대사를 거쳐 維政會(유정회) 의원(9대 국회)을 지냈다.



아이젠하워 美 대통령 당선자의 전선 시찰

 1952년 11월4일에 실시된 미국 제34대 미 대통령선거에서 ‘한국전쟁 휴전’을 公約(공약)으로 내건 아이젠하워 共和黨(공화당) 후보가 스티븐슨 民主黨(민주당) 후보에게 압승을 거두었다.
 아이젠하워는 정치가라기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의 이미지가 훨씬 강했다. 愛稱(애칭) ‘아이크’로 불리는 그는 常勝(상승)의 미 육군을 대표하는 존재였다.
 1952년 12월2일, 아이크가 대통령 당선자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 그의 訪韓(방한)은 극비였다. 그는 김포공항에 내린 후에도 東崇洞(동숭동) 서울대학교 옛 캠퍼스에 들어가 있던 미 8군사령부로 직행해 그곳에서 묵었다. 이튿날인 12월3일 아침, 아이크가 주재하는 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는 미국의 브래들리 합참의장,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레드포드 태평양함대사령관, 밴플리트 8군사령관, 그리고 한국의 白善燁(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이었다. 다음은 백선엽 장군의 회고이다.

<나는 이날 회의에서 한국군 20개 사단 增編(증편) 계획을 설명하면서, 특히 미군 1개 사단을 유지하는 비용으로 한국군 2∼3개 사단의 유지가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이젠하워는 이 계획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을 즉석에서 밝혔다.
 아이젠하워는 회의에 이어 光陵(광릉·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주둔하던 宋堯讚(송요찬) 소장의 수도사단도 방문했다. 동행한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를 서울시민 환영대회에서 영접하기 위해 관련한 지시를 해두었다. 중앙청 앞 광장에는 10만 서울시민이 아이젠하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을 전해들은 아이젠하워 일행은 난색을 표했다. 일정에 계획돼 있지 않을 뿐더러 경호上의 문제로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방한 중에 아직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라는 점을 의식해 공식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꺼렸던 것 같다. 李 대통령의 간곡한 요청으로 아이젠하워는 아들 존 및 수행원을 대동하고 그날(12월3일) 저녁 6시 景武臺(경무대·지금의 청와대)를 방문, 李 대통령과 약 40분간 환담한 후 金浦(김포)비행장으로 직행, 귀국했다. 아이젠하워의 아들 존은 미 제3사단의 대대장으로 근무했는데, 아버지의 대통령 당선 후에는 포로가 되는 不祥事(불상사)를 원천봉쇄한다는 의미에서 같은 사단의 정보참모로 보직이 바뀌었다.     
 1953년 2월11일, 밴플리트 8군사령관이 퇴역했다. 밴플리트 사령관의 후임은 맥스웰 테일러 중장이었다. 테일러 사령관은 제2차 대전 중 미 101공수사단장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고, 戰後(전후) 소련의 베를린 봉쇄 당시에 西베를린 주둔 미군사령관을 지냈다. 훗날 그는 미국 육군 참모총장과 駐越(주월) 미국 대사를 역임했다.
 포병 출신인 테일러는 7개 국어를 구사하는 명석한 인물로 軍政家(군정가)로도 손꼽혔다. 그의 임명은 휴전을  염두에 둔 布石(포석)으로 관측되었다.

核兵器 사용의 한계성

 조기에 타결되리라 생각되던 휴전회담이 공산 측의 지연작전으로 장기화했다. 이에 화가 난 유엔군 측은 戰線(전선)에서 압력을 가해 교섭을 촉진시키려고 했다. 즉, 一進一退(일진일퇴)의 전황을 극적으로 전환시키는 ‘수단’으로서 미군은 戰術核(전술핵)의 사용·配備(배비·부대 배치 및 대비태세)를 검토했다고 한다.
 그 구체적인 작전구상의 하나가 1개 군단을 동해안의 元山(원산)에 상륙시키고, 또 다른 1개 군단이 ‘철의 삼각지대’(평강-철원-김화)를 돌파, 京元線(경원선)을 따라 북상해 상륙부대와 連携(연휴)하려 했던 것이다. 작전명은 ’타론‘. 상륙작전을 제외한 ’산다이얼‘ 작전도 검토되었다.
 아무튼, 이 작전의 성공으로 元山(원산)을 점령하면, 휴전선은 멸악산맥을 따라 원산∼서흥∼해주 라인, 혹은 마식령산맥을 따라 원산∼신계∼개성 라인으로 비스듬히 형성될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동부전선의 일부에 전개되어 있던 북한군 主力도 포위·섬멸할 수 있었다.

 문제는 ‘철의 삼각지’를 어떻게 돌파하는가에 있었다. 築城(축성) 능력이 우수한 중공군은 全전선에 걸쳐 견고한 땅굴진지를 構築(구축)하고 있었다. 아군 쪽에서 보이는 正面(정면)의 陣地(진지)도 제압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우리 쪽에서 보이지 않는 背斜面(배사면)의 陣地에 대해서는 아무리 맹포격을 가해도 효과적일 수 없었다.
 이에 따라 핵폭탄에 의한 공격으로 突破口(돌파구)를 여는 發想(발상)도 검토되었다. 그것은 아군이 주도권을 잡는 공세작전이 된다. 목표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 만큼 아군이 원하는 시간·장소의 선택도 가능했다. 실제로 ‘철의 삼각지’의 頂点(정점)인 平康(평강)에 대한 핵폭격계획이 진지하게 검토되었다. 

 그러나 이들 적극책은 결국 실시되지 않았다. 미 8군사령부뿐만 아니라 미 극동군사령부도 공세작전의 구상에 적극적이었지만, 워싱턴은 그것을 認可(인가)하지 않았다. 동시에 핵폭탄 사용의 돌파작전에 대한 회의적인 견해도 많았다. 극동군사령부 工兵(공병) 막료에 따르면 핵폭탄은 교량 파괴에는 매우 적합한 수단이지만, 이미 파괴해야할 목표는 북한에 없다는 것이었다.  
 위생관계기관의 의견은 더욱 부정적이었다. 被爆(피폭) 지역을 돌파해 가는 경우, 방사능 防護(방호) 및 洗淨(세정)의 장비가 필요한데, 현실로는 그 필요 수량을 확보할 전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더하여 핵공격 발진기지에 대한 보복공격의 우려도 핵병기 사용을 自制(자제)할 수밖에 없게 했다. 그러나 핵병기를 보유한다는 것은 지금도 교전 상대에게 가하는 심리적 압박은 상당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피아의 입장 하에서 휴전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기 위한 고지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피의 능선전투(1951.8.18∼9.1) ▲단장의 능선전투(1951. 9.12∼10.15) ▲백마고지 전투(1952.10.6∼10.15) ▲저격능선전투(1952.10.14∼11.24) 전투 등이었다.
 위의 지도(주요고지쟁탈전 장소)를 보면 한때 아군이 차지했던 351고지, 수도고지, 지형능선, 저격능선, 화살머리고지, 불모고지, 베티고지 등이 군사분계선(휴전선) 북쪽에 위치해 있다. 격전을 벌인 고지 가운데 군사분계선 남쪽에 위치한 것은 피의 능선, 백마고지 정도이다. 이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휴전을 서둔 나머지 공산군 측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대규모 작전을 자제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휴전협정체결 당시 서부전선의 38선 이남인 개성∼연안∼옹진은 피탈되었지만, 대동강 河口 부근 해역으로부터 개성∼옹진 沿岸의 섬들(위의 지도에서 붉은 색으로 표시됨)은 모두가 유엔군의 통제 하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사령관은 38선 이북의 서해상 섬들 뿐만 아니라 서해5도를 제외한 개성∼옹진 연안의 섬들 모두를 북한에 양도했다. 그러나 북한의 수풍수력발전소 등 군비확장에 필요한 산업시설은 철저히 파괴했다.  


북한의 電力 생산, 10% 이하로 저하

 1952년 6월23일, 유엔군은 압록강의 水豊(수풍)댐에 대해 미 제5공군의 F86×84機(기)에 엄호된 해군의 F9F×35機, 공군의 F84×79機와 F80×45機가 모두 200톤의 폭탄을 투하해 발전소를 파괴했다. 수풍발전소는 日帝(일제)가 한반도와 만주 침략을 위해 건설한 것으로, 발전능력은 당시 세계 제4위의 규모인 40만kw에 달했다.
 1952년 7월에는 長津(장진)과 赴戰(부전)의 電源(전원)시설도 파괴했다. 이들 공격에 의해 북한의 電力(전력) 생산은 10% 이하로 저하하여, 중국 동북지역의 공업생산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1952년 9월에도 B29 폭격기가 수풍발전소에 300 톤의 폭탄을 투하, 또다시 발전소를 사용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그 결과, 電源(전원)시설 90%가 파괴되어 북한의 주요 공장 13개소가 완전 가동 불능 상태로 되었다.
1953년 2월에는 중공·북한군에게 휴전회담 재개를 위한 압박으로 灌漑用水用(관개용수용) 댐 등을 공격했다. 이는 댐의 決壞(결괴)에 의해 발생하는 噴流(분류)가 下流(하류)의 시설에 주는 영향, 貯水池(저수지)의 減水(감수)가 농작물에 큰 영향이 매우 크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 댐 공격은 1953년 5월에도 거듭되어 德山(덕산)댐 및 慈山(자산)댐을 파괴했다. 덕산댐의 붕괴는 11km에 걸친 철도의 철로 및 7개의 교량을 流失(유실)시키고, 평양 교외의 順安(순안)비행장을 水浸(수침)시켰다. 또 보급용 창고 6개소와 8개 高射砲(고사포) 중대를 침수시켜 그 효과에 대해 유엔군도 놀랄 정도였다. 慈山(자산)댐도 마찬가지로, 댐의 붕괴에 의해 철도수송은 몇 주간에 걸쳐 중단되었다.
이에 심대한 타격을 받은 북한군은 ‘철천지 원쑤 미제’라는 등의 비난성명을 발표했지만, 그것은 전쟁을 도발한 그들에게는 自業自得(자업자득)의 결과였다. 댐의 복구에는 20만 명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戰略爆擊(전략폭격)은 여러 이유로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중공군과 북한군은 만주 후방기지로부터의 補給(보급)에 의지할 수 있었다. 한편 유엔군은 만주의 보급기지를  파괴하지 못하고 한반도 내에서만 적의 보급을 차단해야 한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침략전쟁의 배후 스탈린의 비참했던 죽음

 1953년 1월20일, 아이젠하워가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아이젠하워는 휴전교섭의 再開(재개)에 노력했지만, 중공·북한 측은 여전히 ‘포로 강제송환’의 원칙을 고집했다.
 이런 대치상황이 지속되던 3월5일, 소련 수상 스탈린이 急死(급사)하자, 공산 측에 다소 누그러진 조짐이 나타났고, 중단 6개월만인 53년 4월26일, 군사회담이 板門店(판문점)에서 재개되었다. 6·25남침전쟁의 배후 조종자였던 스탈린의 急死(급사)로부터 휴전회담 재개에 이르는 과정을 잠시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스탈린의 직접 사인은 뇌출혈. 2월28일, 73세의 그는 크렘린 부근 쿤트세보의 별장에서 새벽까지 이어진 파티가 끝난 후 쓰러진 후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독재자 스탈린의 마지막은 비참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의심과 변덕이 심해 극심한 잔인성을 드러냈다. 그가 죽기 전, 신체의 이상한 변화를 발견한 별장의 경호원들이 측근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측근들은 곧 달려오기는 했지만,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만약 스탈린이 살아나 半身不隨(반신불수)라도 된다면 의학적으로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처형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스탈린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5일간 사경을 헤매었지만, 의학적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어갔다.
 3월19일, 소련의 막료회의는 한국전쟁의 停戰(정전) 방침을 확정했다. 소련 정부는 北京과 평양에 이 결정을 즉각 전달했다. 周恩來(주은래) 외상에게 전달된 소련 정부의 새 방침에는 毛澤東(모택동)으로부터의 무기·탄약·군수물자 등에 관한 요망에 가능한 한 협력한다는 뜻을 담겨 있었다. 그러나 毛澤東은 불만이었다. 그가 6·25남침전쟁에 참전한 댓가로 스탈린에게 요청했던 원폭의 제조기술의 移轉(이전)에 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었다. 반면, 김일성은 모스크바의 정전 방침에 최대급의 讚辭(찬사)를 구사하며 수용했다. 
 스탈린 사망 10여일 전인 2월22일, 클라크 유엔군총사령관은 傷病(상병)포로 교환을 공산 측에 제의했다. 인도적인 문제였던 만큼 응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공산 측은 묵살했다. 그런데 3월28일, 공산 측은 김일성과 彭德懷(팽덕회)의 連名(연명)으로 클라크의 제안에 호응하는 회답문서를 보내 왔다. 더욱이 판문점에서의 회담 재개에도 前向的(전향적)인 내용이었다. 공산 측의 자세 변화는 스탈린의 죽음으로 인한 것으로 보였다. 
 3월30일, 중공 외상 주은래가 北京방송을 통해 성명을 발표, 傷病捕虜(상병포로)의 교환에 동의한 이외에 일반포로 문제의 해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다음날인 3월31일, 김일성이 평양방송에서 그와 같은 취지에 호응했다. 4월1일, 소련정부도 모스크바 방송을 통해 북한과 중공의 입장을 지지했다.
 상병포로의 교환은 리틀 스위치(소규모 교환)라 불렸다. 4월20일부터 판문점에서 리틀 스위치(Little Swich)가 개시되어 5월3일에 종료했다. 유엔군 측은 6670 명의 포로를 북·중 측에 인도했고, 북·중 측으로부터 인수한 것은 684명으로 그 10%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공산군 측이 가만히 대공세를 준비하는 징후가 곳곳에서 드러났다. 휴전교섭이 타결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진지를 뺏으면, 그것이 바로 영토가 되기 때문이다.
 판문점에서의 휴전회담은 4월26일부터 재개되었다. 그것에 호응하듯 국군 제2군단에 대한 중공군의 공세가 5월13일부터 시작되었다. 5월26일까지 계속된 중공군의 공세에 대해 국군 제2군단은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태반의 전초진지를 지켜냈다. 제2군단장 정일권 중장은 중공군이 이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5월26일, 유엔군 측은 양보안을 제출했다. 포로의 任意(임의)송환을 원칙으로 하지만, 付隨(부수)하는 여러 조건에 대해서는 공산군 측과 타협하는 것이었다.

― 본국 송환을 희망하지 않는 反共포로에 대해서는 중립국위원회가 각각의 의사를 확인한다. 同위원회의 구성은 印度(인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스위스, 스웨덴의 5개국으로 한다. 모든 武裝部隊(무장부대)와 관리위원은 印度(인도)가 전면적으로 제공한다.

이런 유엔군 측의 양보안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절대 반대였다.

― 한국 정부와 사전 협의 없이 印度軍(인도군)이 한국의 영토에 진주해 오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 본국 송환을 희망하지 않는 포로를 즉시 해방시키지 않고, 親共(친공)의 중립국위원회에 넘겨 공산주의자에게 설득의 기회를 주는 것을 결단코 허락할 수 없다.
― 한국군은 유엔군으로부터 탈퇴, 한국군만으로 한국의 통일을 위해 최후까지 싸운다.
      
 

 당시의 체코와 폴란드는 지금과는 달리 공산주의 宗主國(종주국)인 소련의 衛星國(위성국)이었다. 그때, 국민(초등)학교 2∼3학년이던 필자도 읍내 역전에서 벌어진 데모에 ‘휴전 반대’의 완장을 차고 참가해 “물러가라! 체코·폴란드!!”를 소리 높여 외쳤다. 사실, 그때 체코·폴란드가 뭔지, 알지 못했다. 완장은 옆집 中1 형이 붓글씨로 ‘휴전 반대’라고 근사하게 써주었다. 그때 “형, 휴전이 뭐요?”라는 필자의 질문에 그 역시 “나도 몰라”라고 대답했다.
 물론, 이때 전국적으로 벌어진 시위는 官制(관제) 데모의 성격도 없지 않았으나, “휴전, 반대!”는 국민감정과도 일치했기 때문에 그 열기가 가히 폭발적이었다. 원래는 한국인인데, 북한군에게 강제 편입되어 북한 군복을 입었다가 포로가 된 사람을 중립국의 심사를 받지 않으면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은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승복할 수 없는 치욕이었다. 이 치욕은 아직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중공군의 제2차 공세가 5월27일부터 시작되었다. 휴전회담의 진행과 連動(연동)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6월23일까지의 사이에 국군 제2군단은 제2방어선으로의 후퇴를 강요당했다. 공산군도 필사적이었다.
 6월8일, 휴전회담은 포로송환협정이 이뤄지는 등 크게 진전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은  ‘본국 송환’을 희망하지 않는 포로를  즉시 해방시키지지 않은 사태에 대해 분노했다.
왜냐하면 유엔군의 포로로 되어 있는 북한군 병사 중에는 본래 국군 병사 및 대한민국의 일반국민이었던 자가 적지 않았다. 북한군에 의해 무리하게 동원되어 강제적으로 북한군에 편입된다든지 했다.
 이들이 북한에의 송환을 희망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본래의 북한군 병사와 같은 취급하는 것은 근본적인 잘못이었다. 이런 사태에 침묵할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었다.


아이크의 관심: 한국의 장래보다 대통령 선거공약 이행 

 이런 상황에서도 負傷病(부상병) 포로의 교환이 성립되어, 全面 휴전의 전망이 갑자기 높아졌다. 그것과 동시에 중공군과 북한군의 잇단 공세가 시작된다. 최후의 공세로써 ‘공산군이 승전했다’는 인상을 對內外(대내외)에 과시하려는 노림수가 분명했다.
 공산 측에서 보아 눈엣가시처럼 느끼는 地形稜線(지형능선)은 丁一權 중장의 제2군단이 장악하고 있던 金城 突出部(금성 돌출부)’였다. 중공군은 5월13일부터 26일까지 사이에 4개 軍[군단]을 동원, 金城 돌출부의 동쪽 측면을 공략,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을 중심으로 한 폭 13km의 정면에서 약 4km 남진했다(제1차 공세). 
 중공군의 金城 돌출부에 대한 제1차 공세가 계속되던 5월25일, 유엔군 측은 讓步案(양보안)을 제출했다. 포로의 任意送還(임의송환)을 원칙으로 하되, 付隨(부수)하는 여러 조건에 대해서는 중산군 측 案(안)에 타협하는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 빨리 끝내고 미군을 본국으로 불러들이겠다는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만큼 휴전 이후 한국의 장래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 선거 공약의 이행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초강수였던 反共포로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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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으로 텅 비어 있는
포로수용소.

 1953년 6월8일, 휴전회담은 포로송환문제에 합의함으로써 크게 진전했다. 옥신각신하던 난제가 어떻든 해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새로운 超强手(초강수)를 구사했다.  
 1953년 6월18일 새벽 2시, 부산·마산·광주·논산 등 전국 포로수용소에서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反共포로들이 일제히 수용소를 탈출했다. 이때의 거제도포로수용소에는 북한으로 송환될 親共(친공)포로들만 남아 있었고, 반공포로 2만7000명은 釜山(부산), 馬山(마산), 光州(광주), 論山(논산) 등지에 이미 분산 수용되어 있었다.
 포로수용소는 국군 관할이 아니라 미군의 병참관구사령부인 KCOMZO 소관이었다. 다만 수용소의 경비는 미군 지휘 하에 국군의 경비부대 및 헌병들이 맡고 있었다. 元容德(원용덕) 장군의 헌병사령부는 수용소 경비를 장악, 사전에 준비한 대로 거사 순간에 맞춰 수용소의 철조망을 끊고 일제히 전등을 켰다. 2만7000명의 反共포로가 심야에 일제히 탈출했다. 大邱(대구) 육군참모총장 관사로 8군사령관과 東京의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으로부터도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다음은 당시의 육군참모총장 白善燁(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중 관련 부분.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이 사태에 대해 자신을 포함한 미군 전원이 사전에 낌새조차 차리지 못한 것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이 사건이 누구의 지시에 의한 것인지 거듭 물었다. 나로서는 어떠한 답변이나 해명도 할 수 없었다. 미국 측 반응이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기 때문에 염려가 앞섰다. 나는 景武臺(경무대)로 전화를 걸었다. 한밤중에 대통령을 깨우는 전화를 한 것은 前無後無(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각하, 클라크 사령관을 위시해 미군들이 대단히 유감스럽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李 대통령은 의외로 담담했다.
“음, 알았어. 내가 했다고 그러게. 내가 아침에 기자회견을 하겠어”
대통령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이처럼 중대한 사태에 임해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데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李 대통령은 6월18일 당일에 항의하기 위해 東京에서 날아온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에게 “내가 장군에게 미리 얘기해 주었다면 장군 입장이 더 곤란했을 것 아니겠소”라고 가볍게 받아 넘겼다.>

미국은 휴전회담을 파국으로 몰고 갈지도 모를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로버트슨을 特使(특사)로 삼아 서울로 급파했다. 1953년 6월25일, 그는 서울에 도착해 협상을 벌였다. 다시 白善燁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회고.

<전쟁 3주년인 6월25일에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來韓(내한)한 로버트슨은 경무대로 들어가 연일 李 대통령과 회담을 벌였다. 나도 이 회담이 열리는 동안 수시로 경무대를 드나들었다.
로버트슨 차관보는 버지니아 출신의 침착하고 끈기 있는 인물이었다. 미국 측 인사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反共포로 석방과 같은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 이승만 대통령과 과연 앞으로 무슨 협조가 되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깔고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이런 불만은 李 대통령에 대한 동정과 존경으로 바뀌어가는 듯했다. (중략) 클라크 사령관은 李 대통령을 “위대한 사람”이라고까지 말했다.>

‘小휴전회담’이라고 불린 18일간의 이 회담에서 李 대통령은 미국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약속을 얻어냈다.

① 상호안전보장조약의 체결
② 최초 2억 달러의 원조자금 공여를 비롯한 장기 경제원조에 대한 보증
③ 한미 양국 정부는 휴전 후 정치회담에서 90일 이내에 실질적 성과가 없을 경우 정치회담 중단
④ 계획 중인 한국군 확장에 대해 육군 20개 사단과 상응하는 해군 및 공군 설치 승인
⑤ 정치회담에 앞서 공동 목적에 대해 한미 간 정상회담 개최

 李 대통령은 이 조건을 얻어내는 대신 ‘휴전’을 양해했다. 反共포로 석방에서 휴전조인까지의 약 한 달간이야말로 李 대통령이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미국을 상대로 한국의 장래를 위해 필요한 것을 쟁취해 낸 극적인 기간이었다.
 여하튼, 李 대통령은 반공포로 석방에 있어 미국 측과 협의 없이 창설했던 헌병총사령부를 동원함으로써 1950년 7월 자신이 제안하고 서명했던 ‘大田협정’, 즉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하기로 했던 약속을 스스로 깨뜨렸다.
 李 대통령이 1960년 4월26일의 下野(하야) 과정에서 미국 측의 도움을 얻지 못한 데는 반공포로 석방으로 심화된 불신감이 작용했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 비밀취급이 종료돼 공개된 미 국방부 문서들은 당시 李 대통령의 제거 계획까지 立案(입안)되어 있었음이 드러났다.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으로 명명된 이 계획은 ▲우선, 李 대통령에게 상호방위조약, 수억 달러의 군사 및 경제원조 등을 약속하여 휴전에 협조하도록 종용하고, ▲이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2단계로 對韓(대한) 지원 약속을 모두 철회하고, 미군의 전면 철수를 내세워 위협을 가하며, ▲이것 역시 실패할 경우 3단계로 쿠데타를 조종해 李 대통령을 축출하고 張澤相(장택상) 총리로 하여금 새 정부를 구성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장택상 국무총리 밑에서 훗날 차례로 대통령이 되었던 金泳三(김영삼) 씨가 비서로 근무했다.  
 
중공군 최후의 대공세와 휴전


 휴전이 임박해지면서 전선에서는 오히려 긴박감이 더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중공군의 1953년 제2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5월27일부터 6월23일까지의 사이에 새롭게 3개 軍[군단]을 증원한 7개 軍의 규모로 太白山脈(태백산맥) 지역에서 공세를 가하려 했던 것이다. 공산 측은 공세를 휴전회담의 진행상황과 連動(연동)시키려는 속셈이었다.
 공산군은 휴전이 성립되기 직전에 전선의 중요한 地形(지형)을 탈취하려고 했다. 중공군이 노린 곳은 역시 金城(금성) 돌출부였다. 1953년 6월 초에 이곳의 일부 능선을 빼앗는 데 성공한 중공군은 이후 약 한 달 동안 대규모 병력을 이곳에 집중시켜 금성 돌출부를 송두리째 삼키려고 했다.
 중공군 최후의 대공세는 7월13일부터 시작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에 의한 6월18일의 포로석방 사건에 대해 보복 및 최후의 일격으로 한국군을 약체화하여 북한의 입장을 유리하겠다는 속셈이 있었을 것이다. 이밖에도 중공군의 노림수는 몇 가지 더 있었다. 

 ▲첫째가 電源(전원)자원인 화천댐과 화천수력발전소의 점령 ▲둘째가 金城의 국군 돌출부를 삭감하여 휴전 후의 군사분계선을 밀어내리는 것 ▲셋째는 火力(화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한국군을 타격함으로써 중공군에 대한 공포심을 가슴에 새기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휴전 발효 2주 전인 7월13일 저녁, 중공군 9개 軍이 기습적 총공세를 감행했다. 국군 제2군단 예하 제6·제8·제3·제5사단, 미 9군단 휘하의 국군 제9·수도사단 등 6개 국군 사단이 담당하고 있는 약 35km의 정면에 대한 공세에 중공군 제24·제68·제67·제60軍 및 후방에서 이동해온 54軍 등 도합 5개 軍이 일시에 동원된 것이었다. 중공군의 軍은 국군의 軍團(군단)에 상당한다. 상상도 하지 못했을 만큼의 대군을 운용한 셈이었다.   중공군은 미군 正面의 부대까지 금성 돌출부 정면으로 이동시켜 人海戰術(인해전술)을 부활시켰다. 人海戰術은 “인민의 바다 속에 적을 몰아넣어 섬멸한다”는 毛澤東(모택동) 전술의 핵심이었다. 
 그 矢面(시면)에 섰던 것이 丁一權(정일권) 중장의 국군 제2군단이었다. 국군 제2군단도 이미 중공군의 대공세를 예상하고 있었다.
 金城川(금성천)에 연하는 20km의 正面을 방어하기 위해 휘하의 사단을 西로부터 국군 제6·제8·제3·제5사단의 병렬시켰다. 20km 의 정면에 4개 사단의 배치는 상당히 密度(밀도)가 높았던 셈이었다. 반면, 예비사단까지 투입했기 때문에 反擊力(반격력)이 없다는 위험까지 무릅쓰고 있었다.
 금성 정면의 일부는 아군 진지가 돌출하고 있어 적이 노리기 쉬운 陣形(진형)으로 되어 있었다. 그날 장대비가 내렸다. 적은 미군 정면에 있던 부대까지 금성 정면으로 이동시켜 공격을 감행했다. 수 시간에 걸친 이례적 공격준비사격 후, 밤의 장막을 뚫고 한동안 스스로 삼갔던 인해전술을 구사했다. 아군 1개 사단에 대해 적은 1개 군단(3개 사단)으로 부딪쳐 왔다.  다음은 당시 제2군단장이었던 丁一權(정일권) 장군의 회고록 <<전쟁과 휴전>>의 인용이다.  

<국군 제2군단의 主저항선 전면에 설치된 前哨(전초)진지의 상황보고가 연대와 사단을 거쳐 군단 지휘소의 전신수화기를 때리기 시작했다.
“중공군이 새카맣게 몰려옵니다!”
그 모두가 피맺힌 절규였다. 군단 前哨線(전초선)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일변했다.
이로써 국군 제2군단 휘하의 제3, 제6, 제7, 제8, 제11, 제5 등 6개 국군 사단과 미 제9군단 휘하의 제9·수도사단의 2개 국군 사단이 중공군의 대공세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 모두가 국군 사단이었다. 미군 사단의 正面(정면)에서 중공군은 밤중에 꽹과리나 치고 피리를 불어대며 虛張聲勢(허장성세)를 부릴 뿐이었다.
이 사실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최전방의 중대까지 퍼져 나갔다. 장병들은 하나 같이 이를 갈았다. 중공군에 대한 적개심이 충천했다.
“결사! 뙤놈들을 섬멸하자!”>

중공군, 제2군단 사령부 북쪽 8km까지 남하

 때마침 土砂(토사)까지 섞인 비가 내렸다. 국군 제2군단으로서는 불운이었다. 항공기의 지원도 포병의 지원도 不可(불가)였다.  금성 돌출부 일대는 地形上(지형상) 아침마다 雲海(운해)가 짙게 끼고 장마까지 겹쳐 미 공군의 공중 지원이 매우 어려웠다. 이런 불리한 조건에서도 제2군단 장병들은 완강하게 버텼다. 그러나 탄환이 부족했다. 7월14일 아침까지, 돌파된 곳곳이 고립되는 위기적 상황을 드러냈다.
 이어 7월15일 아침, 중공군은 華川郡(화천군) 小土古味里(소토고미리)의 제2군단사령부 북쪽 8km까지 육박했다. 소토고미리는 화천읍에서 김화로 넘어가는 5번 국도변에 위치해 있다. 2016년 현재, 이곳에는 육군 칠성사단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다.  다시 丁一權(정일권) 장군의 회고.
 
<사단장은 연대에, 연대장은 대대에, 대대장은 중대에, 중대장은 소대에, 소대장은 분대에, 분대장은 분대의 선두에 서서 싸웠다. 나 역시 각 사단과 연대를 찾아서 지휘관들을 격려했다. 잠 못 이루는 여러 밤이 지났다. 부대를 찾아갈 때에는 지프차를 몰았으나, 부대에 도착하면 고지의 꼭대기까지 걸어야 했다. 수없이 산을 탔다. 때로는 박격포탄 세례를 받고 아슬아슬한 고비를 겪기도 했다.(중략)
7월16일이었다. 金城川邊(금성천변)의 汝文里(여문리)에 집결한 제3사단의 지휘소를 찾아가기 위해 지프차에 오르다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별안간 오한이 들면서 땅이 솟구치는 착각과 함께 실신을 했던 것이다. 눈을 떠보니 군단장실의 야전침대에 누워 있었다. 가스램프의 불빛이 환했다. 머리맡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미 제8군사령관 테일러 장군이었다….>    
 

 
 白善燁(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은 테일러 제8군사령관의 요청을 받고, ‘큰 구멍’을 막기 위해 제2군단사령부 소재지 小土古味里(소토고미리)로 달려왔다. 긴급조치로서, 백선엽 대장이 제2군단의 지휘권을 일시적으로 장악했던 것이다. 40도나 되는 고열로 신음하던 정일권 중장은 만주군관학교 이래의 후배였던 백선엽 대장을 손을 붙잡고 반겼다.
 “白 장군, 면목이 없네. 밀리고 말었어. 조국의 땅을 잃어버렸어!”
 “丁 선배답지 않게 왜 이러세요? 그런 무기력함으로는 이기지 못해요” 
 “增援(증원)이 필요해. 그런데 우린 豫備(예비)를 모두 사용하고 말았어…”
 “8군 예비인 제11사단(국군)을 사용토록 하죠. 지금 바로 華川(화천)으로 부르겠습니다. 또 新編(신편)의 제22사단(국군)도 투입하도록 하죠”
 제8군 豫備(예비)로 동해안에 주둔하던 국군 제11사단(사단장 林富澤 준장)을 급히 중부전선 華川(화천)으로 이동시켜, 戰力(전력) 손실이 많았던 제6사단과 교대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白장군. 미군과의 절충이 어렵잖을까?”
 “이번은 테일러 8군사령관으로부터 白紙委任(백지위임)을 받았습니다. 큰 구멍을 막는 것이라면 미군은 증원과 보급 무엇이라도 大至急(대지급)으로 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날씨가 좋아지면 미 공군의 지원도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테일러 8군사령관이 이미 승낙했습니다”

그런데 중공군의 최후 공세에 의한 金城 전투 직전인 1953년 6월, 도미 유학을 마친 李鍾贊 (이종찬) 중장, 崔榮喜(최영희)·張都暎(장도영)·朴炳權(박병권) 소장 등이 귀국하고 후속으로 유학을 떠날 장성들을 선발해야 했기 때문에 사단장급의 대폭적인 인사이동이 불가피했다. 국군 제2군단에서도 제8사단장 宋堯讚(송요찬) 소장, 제6사단장 白仁燁(백인엽) 소장, 제5사단장 金鍾甲(김종갑) 소장이 후임자에게 임무를 넘겨주고 유학 준비를 위해 물러났다.
 이런 시기에 金城(금성)전투가 벌어지자, 테일러 8군사령관은 新任(신임) 사단장을 신뢰하지 못하고, 백선엽 참모총장에게 前任(전임) 사단장들을 원위치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전임 사단장들을 다시 불러 오는 것은 곤란해요. 사단장 인사는 대통령의 裁可(재가) 사항인데….”
 “사단장 인사를 이처럼 하는 것은 물론 상식에 어긋나지만, 워낙 전황이 급한 시기인 만큼 나와 丁장군이 협의한 것으로 해서 테일러 8군사령관의 요청을 받아들입시다.”

휴전 1주일 앞두고 금성돌출부 9km 피탈 

 작전은 돌파된 肩口(견구)를 틀어막기 위해 서쪽으로부터 鐵原(철원) 정면에 있는 미 제3사단(미 제9군단 예하)이, 동쪽으로부터는 미 제10군단 예하의 국군 제7사단이 각각 공격할 것, 국군 제11사단이 적을 尖端(첨단)을 때리고, 국군 제22사단이 적의 右側背(우측배)를 치는 것으로 했다.
 肩口(견구)는 肩部(견부)의 입구이다. 견부란 전방 및 후방을 잘 관찰할 수 있고, 적에게 공격하기가 좋아 적의 진출을 저지하기에 유리한 위치를 말한다.
백선엽 총장은 ‘전화와의 격투’를 시작했다. 2시간도 경과하지 않은 중에 주위가 떠들썩해졌다. 미군 헬기가 탄환을 운반해오고, 트럭의 대열이 속속 당도했다.
드디어 정일권 군단장의 눈앞을 국군 제11사단의 병력이 힘차게 통과하고 있었다. 제11사단의 이동은 참으로 과감하고 값비싼 결단이었다. 사단 병력의 장거리 이동시간을 줄이기 위해 테일러 8군사령관은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L-20 경비행기를 총동원, 空輸(공수)를 감행하도록 했다.
 수십 대의 L-20기가 온종일 小土古味里(소토고미리)의 활주로를 이·착륙하며 완전무장한 국군 제11사단의 병력을 전선에 투입했다. 국군 제11사단은 小土古味里를 지나면 前線(전선)에서 어수선한 모습으로 후퇴해 오고 있는 다른 부대 병사들을 헤치면서 北上했다. 제11사단의 반격은 성공적이었다. 임부택 준장의 제11사단은 남진하는 중공군을 저지하고, 공세로 전환해 강원도 철원의 赤根山(적근산·1073m)을 탈환했다. 금성지구전투전적비는 적근산 남쪽 5km의 말고개 기슭(철원군 근남면)에 서 있다.

 그때의 제2군단 비행장은 현재 7사단사령부가 위치한 소고미리 남쪽 1.5km에 위치한 화생방지원대(신풍리) 내의 헬기 비행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구내엔 제2군단 창설기념비가 남아 있다. 국군 제2군단은 1950년 북진 시 청천강변에서 붕괴되었던 만큼 소토고미리에 사령부를 둔 제2군단은 실은 재건되었던 것이다. 
 1953년 4월에 新編(신편)된 국군 제22사단은, 하천의 범람으로 고생했지만, 장대비가 걷히자, 미 공군기 1000여 기가 날아와서 적의 진지를 불바다로 만든 데 힘을 얻어, 중공군의 右側背(우측배)를 치는 임무를 완수했다.
 미 제3사단과 국군 제7사단도 반격에 나섰다. 결국, 국군 제2군단은 빼앗겼던 땅의 60여%를 탈환하면서 주요 고지를 다시 확보했다. 백선엽 총장은 이 무렵에 정일권 장군에게 제2군단의 지휘권을 넘기고, 소토고미리를 떠났다.
 이 전투만으로 국군에서는 1만4000 명의 사상자를, 중공군에서는 6만6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우리는 휴전을 불과 1주일을 남겨두고 폭 31km의 금성 돌출부에서 最長(최장) 9km까지의 땅을 탈환하지 못하고 말았다. 


휴전협정 체결

 
金城(금성)전투에서 공세를 멈춘 공산군은 1953년 7월19일 새로운 자세로 판문점 휴전회담에 임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의 석방에도 불구하고 공산 측은 휴전협정 서명을 위한 준비에 착수할 뜻을 밝혔다. 다음은 당시 육군참모총장 백선엽 장군의 회고이다.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나를 불러 휴전협정 조인에 국군 대표가 참석할지에 대해 잠시 얘기를 나누다 “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결론지었다. 결국 調印(조인) 장소인 판문점에 국군은 아무도 가지 않았고, 다만 유엔 대표로 汶山(문산) 평화촌에서 협정서류에 최종 서명하는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의 모습을 우리 회담 대표 崔德信(최덕신) 소장이 참관토록 했다. 李 대통령이 휴전협정 당사자로 우리 쪽 서명을 피한 것은 휴전 이후에 대해 유엔, 즉 미국이 책임을 지도록 한다는 구상 때문이었다.>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서명된 휴전협정 서류가 교환되고, 그로부터 12시간 후인 밤 10시부터 휴전이 발효되었다. 3년1개월, 즉 1129일 만에 戰火(전화)가 일단 멎었다. 
 그러나 휴전은 終戰(종전)이 아니었다. 단순히 전쟁행위의 일시 중단에 지나지 않았다.
1129일간 계속된 전쟁에서 인명손실은 우리 민간인 사망자 37만 여 명, 부상자 22만 명, 행방불명자 38만 여 명. 국군 전사자 22만 여 명, 부상자 71만 여 명, 행방불명자 4만 여 명. 미군 전사자 4만 명, 부상자 10여 만 명, 행방불명자 8000여 명 등이었다.
 한편 북한의 민간인 사상자 및 행방불명자 270만여 명, 북한군의 사상자 및 행방불명자 60만 명. 중공군의 사상자 및 행방불명자 100만여 명.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괴뢰였던 金日成의 6·25 전쟁 도발에 의해 양측 도합 630만 명이라는 인적손해가 발생했던 것이다. 
 물적 피해도 인명피해에 못하지 않았다. 개인의 가옥 및 재산은 물론 도로·철도·교량·항만 및 산업시설은 대파되었고, 학교·공공시설도 파괴되었으며, 사회경제의 기반이 황폐해졌다.
1953년 8월5일, 포로의 대규모 교환인 ‘빅 스위치 작전 및 ’빅 스와프 작전‘이 개시되었다. 前者(전자)는 공산군 측으로부터의 포로 인수, 後者(후자)는 공산군 측에의 포로 引渡(인도)였다.
 모두 본국 송환을 희망한 포로의 교환이기 때문에 引受(인수)와 引渡(인도)는 담담하게 진행되었다. 유엔군 측의 引受는 1만3000여 명, 引渡는 8만2000여 명이었다.
 본국 송환을 거부한 反共포로가 공산 측의 집요한 설득을 마다하고 자유를 획득했던 것이 다음 해(1954년) 1월23일이었다. 그 숫자는 2만2000여 명. 이미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석방된 반공 포로 2만7000여 명과 합계하면 유엔군 측이 구제(救濟)한 反共포로의 수는 5만 명을 넘었다. 중공군 포로 전체 중 약 70%인 1만4000여 명이 臺灣(대만)으로 갔다.


NLL에서 물러서면 수도권이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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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NLL

 휴전협정 체결 1개월 후인 1953년 8월30일, 유엔군사령관에 의해 획정된 남·북한 간의 해상경계선으로 서해는 서해5도와 북한지역의 중간선을 기준으로 북방한계선(NLL)을 긋고, 동해는 군사분계선(MDL)을 기준으로 설정되었다.
그렇다면 왜 NLL을 설정했던 것일까?
 1953년 7월27일 체결된 남북 정전협정의 부속지도에서 남·북한의 군사분계선은 명시되었으나 해역의 경계선에 대해서는 정한 바 없었다.
 정전 당시 공산국 측 해군은 거의 없었고, 한반도의 거의 모든 섬은 아군이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정전 당시 대치선을 분계선으로 한다”고 합의한 정전협정 원칙에 의해 당시 점령하고 있던 모든 섬, 심지어 평양으로 연결되는 대동강 하구의 초도와 석도까지 우리 땅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현실적 문제를 고려하여 자발적으로 38선 이북의 섬에서 유엔군을 철수시켰다. 또 북한과의 충돌을 막기 위해 38선 이남에 위치한 서해5도와 ‘북한 땅’이 된 개성∼연안∼옹진 연안의 중간에 NLL을 일방적으로 획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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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한계선과 북한이 주장하는 해상경계선



 서해 NLL 획정에 대해 북한은 휴전 후 20년간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북한이 NLL을 문제 삼기 시작한 것은 1973년 군사정전위원회. 북한은 서해5도 주변 바다는 북한의 영해이므로 이곳을 통과하는 선박은 사전승인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북한은 NLL 무력화를 위해 간헐적으로 NLL을 침범했으며, 그 결과로 제1연평해전, 제2연평해전, 대청해전,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도 포격 도발 등을 감행했다.
 특히 1999년 9월2일, 위의 요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기도와 황해도의 도계를 잇는 선을 남북 간 해상경계선으로 주장하고, 서해 5도 출입을 위한 2개 水路(수로)를 설정하고, 이곳을 통행하는 선박은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특히, NLL 일대 해역 및 서해5도는 우리 수도권을 방어하는 데 필수적인 핵심적 전초기지인 만큼 이를 수호하는 것은 국가안전보장의 요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재임 시의 노무현은 NLL과 관련한 利敵(이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休戰(휴전)을 위한 미국의 집요한 압력에,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 침략의 재발 방지를 제도적 장치가 없이는 절대로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에 아이젠하워 미 행정부는 군사동맹 체결을 약속했다. 이에 따라 1954년 11월17일, 韓美(한미) 양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작전 지휘권을 駐韓(주한) 유엔군사령부로 이관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었다. 조약의 제3조에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

<조약국 영토에 대한 외부의 침략이 있을 경우에 한해서 조약을 이행하며, 한국이나 미국이 일방적으로 적국에 선제공격으로 전쟁을 걸었을 경우에는 조약을 발동할 수 없다.>

 또한 조약 제3조를 발동할 때에도 미국 행정부는 헌법 절차에 따라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되어있기 때문에 유사 시 미국의 ‘自動(자동) 참전’을 보장하고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은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끈질기게 미국 정부를 설득해 1978년 11월7일부로 ‘韓美聯合司令部’(한미연합사령부)를 창설해 유사 시 미국의 自動(자동) 참전이 일부 보장되었다.
 우리는 한미연합사라는 연합방위체제를 유지함으로써 방위력 증강에 드는 비용 일부를 절약하여 경제발전에 轉用(전용)할 수 있었다.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점을 겨냥해 한미연합사를 출범시켰다. 지금, 세계 유수의 국가들은 모두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영국·프랑스·독일 등 西유럽 국가들은 NATO, 일본은 미일안보동맹으로 안보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한미연합사 체제에서는 전시에도 한국의 합참의장은 50%의 지휘권을 보유하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제도적 조치에 의해 경제개발을 지속, 한국은 세계 最貧國(최빈국)에서 오늘날 세계5대 공업국, 6대 무역국으로 도약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安保(안보)의 틀을 깨려는 反국가단체가 지금 우리 사회는 100여 개에 달한다. 
 심지어 노무현은 대통령 취임 다음해인 2004년 미국을 압박하여 2015년 12월1일을 기해 한미연합사를 해제하기로 합의했다. 그의 퇴임 후  한미연합사 해체를 연기시키기 위해 우리 정부는 미국과 협상을 벌이는 바람에 미군 부대의 이전 비용 중 일부까지 우리가 부담하고 있는 실정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연합사 해체 및 NLL 관련 발언을 생각하면 그가 국가이익과는 정반대의 길을 갔음을 느낄 수 있다. 예컨대 노무현의 언행과 미국 대통령 케네디의 언행을 비교해보면 국가이익과 국가안보와 관련해 정반대의 입장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케네디 대통령의 단호한 대처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10월14일 미국 측의 첩보기 U-2에 의해 쿠바에서 비밀리에 건설 중이던 소련 미사일 기지의 사진과 건설 현장으로 부품을 운반하던 선박의 사진이 촬영되면서 시작된 미국과 蘇聯(소련)의 대립을 뜻한다. 
 케네디 정부는 소련의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을 선전포고로 받아들일 것이며, 제3차 세계대전도 불사하겠다는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사태가 일촉즉발의 단계에 이르자, 결국 소련 측이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을 중지했다. 그에 대한 대가로 미국 측은 터키에 있던 미국의 ICBM(대륙간탄도탄) 기지를 철수시켰다.
 쿠바에서 미국 국토의 동남단인 플로리다 半島(반도)의 마이애미까지는 450km. 휴전선에서 서울까지는 불과 50km.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북한의 핵실험, 잠수함에서 미사일 발사실험 등에 대해 단호한 응징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핵에 대한 대변인 노릇을 했던 대한민국 대통령이 노무현이었다. 2015년,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쿠바와의 국교회복으로 턱밑의 위험을 완전 제거했다.

6·25 남침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6·25전쟁은 한반도를 적화하려고 했던 북한의 김일성에게 소련의 스탈린이 무기를 대고 중공의 毛澤東이 병력을 보탠 남침전쟁이었다. 남한은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에 고통의 늪에 빠졌지만, 이를 극복하고 이제 정치적·경제적 선진화를 이룩했다.    
 2013년 7월27일, 미국 워싱턴 소재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에서 열린 정전협정 60주년 기념식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6·25전쟁은 무승부가 아니라 한국의 승리였다”면서 “한국인이 누리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는 북한의 빈곤·억압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이는 한국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6·25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남북은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지금까지 대치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지 않고, 대화로써 평화통일을 이룩하는 것이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다만, 북한이 핵무기를 들고 또다시 침략한다면 단호히 북한의 김정은 집단을 멸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이럴 경우, 북한은 고구려 독재자 淵蓋蘇文(연개소문)의 死後(사후)에 세 아들 간의 후계자 다툼으로 나라를 멸망시킨 역사의 前轍(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원래, 거센 체 큰소리나 치며 발호하는 정권이 오래 지속된 역사적 사례는 없다.
북한의 애숭이 독재자는 지금 스스로의 墓穴(묘혈)을 파고 있다. 그는 소형화된 핵탄두라는 것을 제 앞에 놓고 어루만지면서 남한에 대한 ‘해방전쟁’을 호언하는가 하면 “수소폭탄이 떨어지면 맨해튼(뉴욕의 중심가)이 잿더미로 된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상한 것은 우리 국민의 반응이다.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따위의 공갈을 듣고도 남의 집 개가 짖는 것쯤으로 치부하고 泰然自若(태연자약)할 수 있는 것인가? 혹시, 우리는 국가 안보를 남에게 의존해 온 끝에 이제 제 손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마저 희미해진 것 아닌가?
 북한이 핵폭탄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광분하는 이유는 너무나 뻔하다. 핵폭탄을 탑재한 장거리 미사일을 뉴욕이나 워싱턴을 겨냥해놓고, 미국에 대해 한반도의 ‘민족문제’에 개입하지 말라고 요구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은 동맹국 한국을 지키기 위해 自國(자국)을 핵 공격에 노출시키는 ‘산타클로스’가 아니다. 국제정치에서 동맹이란 相互施惠的(상호시혜적)이고, 자신에게 得(득)이 되어야 작동하는 것이다.
 북한의 독재자는 핵무기로 남한을 위협하면서 남한의 從北(종북)들과 연합해 또다시 남침을 시도할 것이다. 미국의 영토를 향한 대륙간탄도탄이 발사준비단계에 있는 상황에서도 과연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즉각 작동할 것인가? 그것은 이제 누구도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이제, 우리가 自衛的(자위적) 핵무기를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안보 위기상황은 북한의 反민족적 독재정권이 존속하는 한 지속될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은 웰빙이나 권력의 配分(배분) 문제를 놓고 曰可曰否(왈가왈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끝)

언론의 난
[ 2016-08-24, 16:35 ] 조회수 : 39020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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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호     2016-09-23 오후 3:44
장기간 최근에 밝혀진 자료로 6.25를 조명해주신 노고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6.25를 새로 이해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시 좋은 기사를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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