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4)/ 南侵 ‘D-데이’를 속인 북한군
6·25 최대의 격전지였던 백마고지 답사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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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 著《한국전쟁의 기원》의 허구성 폭로
          
하기와라 씨의 《조선전쟁》은 375페이지에 불과하지만, 1500페이지가 달하는 시카고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근거 없음을 만천하에 폭로한 역작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탈취문서’ 등의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고 픽션에 불과한 《한국전쟁의 기원》을 저술해, ‘북침설’을 주장하는 북한 당국이나 從北(종북)들에 의해 아직도 자주 인용되고 있는 책이다. 오우삼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군사비밀을 지키기 위해 “우리 부대는 福溪(복계-자주포대대의 원래 주둔지)로 돌아간다”고 하자 다소의 의문과 실망의 기분을 드러냈지만, 철원(38선의 북쪽 30km)으로부터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을 때는 “역시 그렇지”라며 동무들은 기뻐했다. 
행군 중에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되고, 큰소리를 내서는 안 되고, 정차 시에 멋대로 하차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행군 질서는 여러 동무들 모두 자각적으로 지켰다. 더욱이 행군로가 좋지 않고 야간행로를 주의 깊게 운전하는 운전수 동무들은 매우 긴장한 태도로서 사고도 없이 질서 바르게 행군했다. (중략) 도착시간은 6월18일 2시였다. 도착과 동시에 포 참호와 일체의 위장이 날 밝기 전에 집결구역에서 완수했다. 이것은 고도의 경계심으로부터 이루어진 성과이고, 모든 전투원의 기세가 고도로 앙양한 결과이다.>

<오우삼 보고서>는 남침 직전 병사들의 심리상태까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다음은 보고서 중 ‘집결구역에 있어서 군무자들의 사상동향’에 대한 요약이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즉시 포 참호의 구축과 자동차의 위장, 砲座地(포좌지), 경계조직을 지휘관의 명령대로 단시간에 완료했다. 도착한 최초의 早食(조식)이 늦어진 데 따라 시간의 여유가 있어 취침토록 했지만, 잠자지 않고 소곤소곤 하고 있는 동무들이 3분의 1이나 되었다. 이것은 적의 전방에 왔기 때문이 아니고 겁나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의 소원이 달성된다고 하는 기쁨으로부터 오는 긴장 때문이다.
6월19일에 또다시 상부 명령에 의해 우리 구역을 500미터 전방의 위치로 옮기도록 되었을 때도 역시 야간행동으로 침착하게 이동, 밤 늦게까지 砲座地, 자동차 은폐, 護衛燈(호위등)에 모든 자가 일체가 되어 기세 높게 작업에 착수했다. 특히 6월19일 저녁, 상부의 지시에 의해 反(반)전차중대 제1·제2소대는 葛末(갈말, 38선 북쪽 약 14m에 있는 현재의 新철원)로 갔지만…(중략). 특히 6월20일, 종일 비 오는 날에 무기·자동차를 애호하는 것과 스스로 포 진지를 사수하는 것에 그들의 기세가 높았다. 종일 비 속을 운전수와 포수 동무들은, 특히 渡河器材(도하기재)를 보수하고, 흠뻑 젖은 옷을 입은 동무들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남조선 국회에 보내는 결정서를 듣고, 피로를 느끼는 것 없이 완전하게 야영전투준비를 갖추었다.>

남침 직전 인민군 병사의 상황을 그 심리상태까지 섞어서 이만큼 생생하게 묘사한 문서는 이 이외엔 발견된 사례가 없다. 이 문서는 북한군의 하계 전투훈련이 어떻게 남침으로 전화했는지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 

포천은 포천천 西岸(서안) 또는 옛 43번 국도변의 신읍리를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이다. 1990년대 들어서 43번 국도가 고속화도로로 확장되고 서울과의 교통이 편리해짐에 따라 활기찬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양문리 북쪽의 영북면 雲川里(운천리)과 영평천 상류의 ‘이동 막걸리’로 유명한 二東(이동)은 모두 군사적 요충이다. 운천은 모 부대 근처 15m 지하에 적의 땅굴이 내려와 있다는 땅굴탐사 전문가인 이종창 神父(신부) 등의 TV 출연 발언으로 주목받고 있는 곳이다. 이종창 신부는 최근 그곳에 聽音機(청음기)를 들이대었더니 “빨리 빨리 파라우! 밥 먹으러 가기요“라는 북한군 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포천분지는 이제 市로 승격해 있지만, 낙농·양돈·양계 등의 기업적 축산이 성하고, 인삼·잣·느타리버섯의 생산량이 많다. 1990년에 인삼밭이 전국에서 전북 진안군·충남 금산군 다음으로 많았다. 원래 ‘개성 인삼’의 어미땅은 포천이었다고 한다.


서울에 1번 入城한 적 3사단의 展開 지역- 철원 
 
43번 국도를 달려 영북면 운천리를 지나면 강원도 철원군의 葛末邑(갈말읍). 이제 ‘新철원’이라고 불리는 갈말읍에는 철원군청, 버스터미널, 철원공설운동장 등 철원군의 중심기관 및 시설들이 몰려 있다. 이곳은 남침 직전, 북한군 제3사단이 전개했던 곳이다. 제3사단은 남침 개시 3일 후인 6월28일 서울에 1번으로 돌입해 최고사령관인 김일성으로부터 ‘서울 근위 제3사단’이라는 칭호를 받은 정예부대였다.

제3사단은 38선 북쪽 46km에 위치한 平康(평강)이 원래 주둔지였다. 평강은 분단 이전엔 동해안 대도시 원산과 서울을 잇는 京原線(경원선) 철도의 주요 역 중 하나로 교통의 요충이었다. 사단장은 소련군 상위(중위와 대위의 중간 계급) 출신인 李英鎬(이영호) 소장. 제3사단의 秘匿名(비익명)은 395군부대. 예하 제7연대, 제8연대, 제9연대, 砲聯隊(포연대), 교도대대, 反전차대대, 공병대대, 자주포대대, 정찰중대 등의 병력 1만 1000명이 철원 일대에 집결해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371부대, 즉 砲(포)연대의 경우 38선 북쪽 30km, 43번 국도변에 위치해 있었다. 미군의 <탈취문서>에 의하면 포병연대장 안왈성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1.(생략)
2. 모든 군무자들은 금일의 긴박한 조국의 정세를 정확히 인식하고 조국과 인민의 부름에 응해 언제라도 즉시 동원 가능하도록 준비할 것. 고장 병기가 하나도 없도록 할 것. 특히 포와 자동차에 대해 항상적인 점검을 실시함으로써 언제라도 동원 가능하도록 항상적인 전투준비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것.
3. 군관들의 포사격 지휘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어떠한 조건 하에 있어서도 이미 하달한 포 사격학의 복습계획에 의거해 매일 2시간씩 반드시 집행할 것. 특히 6월25, 26일의 양일에 실시되는 중대 실탄사격을 원활하게 거행하기 위해 이미 하달한 본인의 명령 제0108호에 의해 구체적인 훈련을 조직 실시할 것.>

위의 문서를 보면 북한군 제3사단의 포병연대장은 남침의 D-데이를 ‘포 실탄사격일’로 호도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1950년 6월13일, 북한군은 민족보위상 崔鏞健(최용건)의 명의로 각 사단에 대해 남하 지시를 내려 각 사단은 38선 가까이로 이동을 개시했다. 38선 북쪽 46km 지점인 平康(평강)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 제3사단은 38선 북쪽 20km 전후의 지점인 철원 일대에 전개해 위의 문서에서 보는 바처럼 맹훈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또 민족보위성 포병사령관 金무정 중장은 14개 사단과 그것에 준하는 부대에 대해 <信管(신관)조정작업에 관하여>라는 6월15일자 지령을 發(발)했다. “현재 부대에 보유하고 있는 포탄 100%에 모두 신관을 붙여 사격에 지장이 없도록 기술적으로 보장하라. (중략) 1950년 6월23일까지 결과를 同사령관에게 보고하라”

信管(신관)은 포탄을 灼熱(작열)시키기 위한 起爆(기폭) 장치이다. 全사단이 보유한 포탄 모두에 신관을 붙이도록 지시했던 이 지령은 남침이 ‘초읽기’ 단계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복지구인 철원군은 행정구역이 철원·東松(동송)·갈말·金化(김화)의 4개 읍 등으로 구성되었다. 민간인 통제선 바로 남쪽의 철원읍과 동송읍은 시가지가 이어져 있어 하나의 생활권이다. 철원읍은 수복지구를 배려한 행정적 편제의 읍일 뿐으로 인구는 미미한 수준이다. 2013년 들어 경원선 철도가 白馬高地(백마고지)역까지 연장 운행되어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되는 곳이다. 수복 후 가장 일찍 주민들이 정착한 곳은 동쪽의 갈말읍이다. 이곳이 新鐵原(신철원)이라 불리는 군청 소재지이다.
 
갈말읍에서 다시 5km 쯤 북상해 463번 지방도로로 길을 바꿔 2km쯤 달리면 漢灘江(한탄강) 위에 한탄대교가 걸려 있다. 이 다리를 건너 孤石亭(고석정) 광장에 승용차를 주차시키고, 이곳 관광사업소’에 들러 오후 2시30분에 출발하는 ‘철의 삼각지 견학’을 신청했다. 한탄강 중류의 고석정은 조선 明宗 때의 義賊(의적) 임꺽정이 은신했던 곳이다.

고석정 아래 순담계곡은 한탄강 물줄기 중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며 이곳 3개의 레프팅 코스에는 연간 약 50만 명의 마니아들이 찾는 곳이라 한다. 현무암 지대가 침식되어 이룬 폭 20~30m의 협곡은 기묘한 바위와 깎아내린 벼랑, 깊은 계곡에는 보기 드문 모래밭이 어울린 절경이다. 순담계곡 동쪽에는 1963년 民政(민정)이양을 앞두고 군복을 벗은 朴正熙(박정희) 육군 대장의 전역식이 거행된 지포리가 있고, 그 위의 군탄공원에는 그의 전역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오후 2시30분, 안내공무원의 인솔로 ‘철의 삼각지 안보견학’을 위해 광장을 출발했다. 견학단은 단촐하여 중국인 청년 30여명이 탑승한 관광버스 1대와 그 뒤를 따라가는 승용차 3대가 전부였다. 주말(토·일요일)에는 개인차량의 이용은 ‘불가’이고 그 대신에 요금 8000원을 받는 셔틀버스가 다닌다. 마식령 산맥에 둘러싸인 철원은 일교차가 심한 기후의 영향으로 이곳 쇠고기와 돼지고기는 육질이 부드럽고 고소하다고 한다.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땅굴 16개가 더 있다”

제8통제소를 지나 土橋(토교)저수지를 지나 남방한계선에 위치한 제2땅굴을 30분쯤 견학했다. 견고한 화강암층의 지하 50~160m 지점에 있는 이 땅굴은 총연장 3.5km, 그 중 군사분계선 남쪽으로는 1.1km를 파내려 왔다. 그 의도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국군 제1선 부대의 뒤통수를 치겠다는 것이다.

그 규모는 높이 2m의 아치형 터널로서 대규모 침투가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철책선 지대에서 발견된 이 땅굴은 국군 초병이 경계근무 중 땅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듣고, 시추작업으로 땅굴 소재를 확인한 후 수십일 간의 작업 끝에 발견된 적의 기습용 땅굴이다.   

김일성은 1968년 “적 후방에 제2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땅굴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면서 “땅굴 하나가 핵무기 10개보다 효과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 30여 년 간 민간 차원에서 땅굴 탐사작업에 참여해 온 이종창 신부는 2013년 4월16일 TV조선에 나와 이미 확인된 남침용 땅굴 4개 이외에 장거리 땅굴 16개를 더 발견해 우리의 증거를 좌파정권 시절에 국방부와 합참 통보했지만,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아직도 인정받지 못해 당국 차원의 탐색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남침용 땅굴 발견의 공로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던 가톨릭교회 내의 지하 탐사 전문가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 6월5일 군·관·민 합동 태스크포스를 조직해 땅굴탐사를 벌였다.

故 황장엽씨는 망명 후 북한이 1954년부터 남침용 땅굴을 파왔다고 밝혔고, 최근 탈북한 외교관 출신 김태산씨는 북한군의 장거리 땅굴이 수도권 지하철에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고, 미국 CIA는 美 의회에서 북한이 판 땅굴이 40개로 추산되고 있다고 보고한 바 있다. 

이종창 신부는 “김포지역으로 연결되는 땅굴은 해병 제2사단 바로 앞에 출구가 있고, 개풍-임진강-가좌역-신촌역으로 연결된 땅굴은 서울역 지하도에 출구가 있으며 4호선 전철-창경궁-혜화동으로 이어지는 敵의 땅굴은 청와대 옆에 출구가 있다”고 주장했다.

2010년 5월, 국정원은 미모의 여간첩이 수도권 전철 간부와 접촉, 수도권 전철 도면 300매 등 기밀자료를 빼내 월북한 사건을 발표한 바 있지만, 아직 그 후속조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이 시점에서 우리 안보라인 전반을 再점검할 필요가 있다. 좌파 정권 하에서 민간에서 “땅 밑에서 폭파소리를 들었다”는 등의 제보를 해도 軍 관계자는 “평화시대에 그런 소리 말라”고 되레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우리 사회에 침투해 있는 북한의 첩자들이 누구인지 밝혀질 것이다.  1982년·1986년 동계올림픽 여자 피겨 부문에서 금메달을 받은 카타리나 비트가 슈타지(동독의 정보기관)의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동독 멸망 후에야 밝혀진 사실이다. 동방정책을 추진했던 빌리 브란트 西獨(서독) 수상의 비서실장도 동독의 간첩이었다.

이제는 立證(입증)된 사실이지만, 유엔 창설의 마스터플랜과 戰後(전후) 세계 경제질서의 틀을 규정한 브래튼우즈 協定(협정)의 産婆(산파)는 美 국무부와 재무부의 엘리트 관료였지만, 실은 소련의 고정간첩이었다.

남북 대치상황에서 북한 수뇌부가 바보가 아니라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해외로 나가 어렵게 공부하던 우리 유학생들을 포섭하는 수법 등에 의해 우리 사회 곳곳에 다수의 고정간첩을 투입해 두었을 것이다. 황장엽 前 노동당 비서는 생전에 남한에 있는 종북세력과 간첩이 5만 명에 이른다고 말한 바 있다. 터놓고 날뛰는 從北(종북)은 오히려 바람잡이 수준의 조무래기일 수도 있다.  
 

궁예의 都城과 김일성 高地가 보이는 곳
             
제2땅굴을 뒤로 하고 東松(동송)저수지에 이르렀다. 土橋(토교)저수지와 동송저수지 모두 대규모 人工(인공) 저수지다. 철원군은 많은 땅이 북한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수지 등 水利(수리)시설이 보강되고 민간인통제선 안으로도 출입영농이 허용되어 강원도 제1의 곡창지대가 되었다. 경지 중 논 비율이 거의 85%에 이르며 쌀 생산량이 강원도 전체 생산량의 20%에 가깝다.

특히 철원의 ‘오대쌀’은 휴전 이후 인적이 끊긴 비무장지대에서 흘러드는 청정한 물과 해발 250m 고원의 신선한 바람, 기름진 황토흙, 깨끗한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존된 무공해 지역에서 생산되어 밥맛이 좋다. 농가의 가구당 경지면적이 넓고, 영농의 기계화도 일찍 추진되었다. 서울과의 거리가 편리한 갈말·동송 지구는 낙농·양돈·양계가 성하다.

동송저수지 남쪽에서는 아이스크림 고지가 指呼之間(지호지간이다. 잘 나가는 K팝 스타 현아의 甘唱(감창) “맛있는 아이스크림∼”이 아니다. 6·25 때 피아간에 처절한 쟁탈전과 포격이 극심해 산이 마치 아이스크림 녹듯 흘러내렸다 해서 붙은 별명이다.

본래는 이 산 밑에 삽송리이라는 마을이 있어 삽송봉(또는 삽슬봉)이라 불렸다. 초소 조금 지나 모노레일을 타고 철원 평화전망대로 올라갔다. 철책선 너머 DMZ(비무장지대)에는 泰封國(태봉국)의 都城(도성) 터가 보인다. 鐵原(철원), 바로 ‘쇠둘레’는 후삼국의 최강으로 군림했던 弓裔(궁예, ?~918)가 도읍을 했던 고을이다. 궁예는 918년 부하장수였던 王建(왕건)의 쿠데타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고, 역사에서는 ‘失性(실성)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왕건이 바로 高麗(고려)의 태조이다. 전망대에선 평강 高原과 북한 선전마을도 볼 수 있다. 

이어 月井里驛(월정리역)으로 이동했다. 효성 깊은 처녀가 살았던 ‘달우물마을’이라는 뜻의 월정리는 분단 전에는 경원선 철도가 통과하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지금은 100여m의 철로와 부식된 기차의 몸체만 나뒹굴고 있다. 그곳 남방한계선으로 연결된 통로엔 국군 제6사단의 靑星(청성, 푸른 별) 마크가 붙어 있다. 제6사단은 6·25 발발 초기 春川(춘천) 전선에서 선전했고, 북진 때는 초산까지 올라가 압록강의 물을 수통에 담아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부대이다.

월정리역에서 내려와 제5통제소 앞에서 안내 공무원과 헤어졌다. 민간인통제선 밖으로 나온 것이다. 민간인통제선 바깥에 있는 ‘백마고지 위령비’(철원읍 大馬里)에 참배했다. 백마고지는 남방한계선 너머의 DMZ(비무장지대) 안에 있다.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중공군 1만 4000 명의 사상자를 냈고  국군도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다음은 <월간조선> 2001년 8월호에 실린 拙者(졸자)의 ‘백마고지 답사기’이다.

<백마고지에 접근한 오후 5시 무렵, 적의 GP에서 이른바 ‘주체사상’에 대한 선전선동 방송이 한창이더니 어느 결에 ‘장군님 은덕’ 운운으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우리 국군 장병에 대한 그들의 심리전은 집요했다.(중략)
백마고지에 오르면 우리의 主敵(주적)이 보인다. 백마고지 우측으로 펼쳐진 고지가 북한의 대성산(530m)인데, 敵 연대 관측소가 위치하고 있다. 백마고지와 대성산 사이에 보이는 새부리 모양의 산이 북한의 고암산(780m)이다. 고암산은 김일성이 직접 전투를 지휘했던 곳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김일성고지’라고 불린다. 백마고지 전투의 패전으로 드넓은 철원평야를 빼앗긴 데 대해 김일성은 매우 통분해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백마고지 좌측에 보이는 야트막한 산이 266고지로서 백마고지 전투 당시 제9사단장 金鍾五(김종오: 훗날 육군참모총장 역임·1966년 별세) 준장이 전방지휘소로 사용했던 곳이다.(중략) 백마고지는 원래 ‘大馬里(대마리) 뒷산’으로 불리는 無名(무명)고지였다. 그러나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촌토를 다투면서 피비린내 나는 격전장으로 변했다. 1952년 10월6일 중공군의 대공세로 혈전이 시작되었다. 이후 열흘 간 공방전을 벌이는 가운데 스물네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
중공군 38軍(군)은 병사들에게 배갈을 마시게 하여 人海戰術(인해전술)을 감행했다. 여기서 중공군은 1만4000여 명의 전상자를 내어 2개 사단이 완전히 와해되었다(중략).
대마리의 無名(무명)고지는 전투 당시 피아의 포탄 떨어져 하늘에서 산의 모습을 보았을 때 한 마리 白馬(백마)가 누워 있는 듯하다고 하여 ‘백마고지’라는 이름을 얻었다. 포격으로 인해 산 높이가 1m 가량 낮아졌다고 한다.(후략)>
   
이날 답사를 함께 한 중국 청년들도 백마고지 전투의 현장을 역사 그대로로 받아들이는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철원 전망대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내려올 때 연장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등 동양적 미덕도 보였다. 

[ 2013-07-05, 18:1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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