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2)/ 국군 제1·6·8사단의 奮戰
T34 戰車에 의해 유린된 의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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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내부의 불가사의한 것들 
                    
6·25 발발 직전, 국군 일부에서는 南侵 위기를 상당히 심각하게 거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 생각하면 참으로 불가사의한 상황이 드러난다. 바로 이 해 4월에는 고급 간부의 인사이동이, 6월에는 부대 개편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서울 방어의 핵심 부대인 제7사단은 예하 3개 연대 중 1개 연대가 1개월 전 다른 사단(수도경비사령부)으로 가고 그 대신 오기로 되어 있던 제25연대는 6·25 발발 당일인데도 아직 충남 溫陽(온양)에 주둔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또한 제7사단과 더불어 서울 방어 핵심부대인 제1사단의 백선엽 사단장은 육본의 명에 의해 始興(시흥) 소재 육군보병학교의 被(피)교육자 신분으로서 부대를 떠나 있었다.   
      
더욱이 6월11일부터 실시된 비상경계령이 6월24일 오전 0시를 기해 해제되었고, 거의 모든 부대에서 외출 및 휴가가 허가되었다. 사실, 당시엔 최소한 20~30%의 병사들에게 휴가를 주지 않으면 營內(영내)에 있는 병사가 배불리 먹을 수 없을 정도로 軍의 給養(급양)은 부족했다.

1960년대 후반까지도 전방에 있던 우리 병사들은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었다. 당시 소대장들 중에는 박봉(소위 초임 월급 1만원)을 털어 병사들에게 PX빵을 사서 먹이는 경우가 흔했다. 그때는 “面(면)서기 빽이라도 있으면 전방에 가지 않는다”고들 했다. 실제로 당시 전방의 병사들은 대부분 시골 출신 청년들이었는데, 글을 모르는 머슴 출신도 많았다. 그들이 입고 있던 작업복은 기운 데를 또 기운 누더기였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1968년 1·21 사태 후  남방한계선에 철책선을 치고 그 뒤에 교통호와 無蓋壕(무개호)를 만들어 나라를 지켜낸 ‘진짜 사나이’들이었다.   

6·25 발발 하루 전날 밤, 서울에서는 고급간부 및 美軍 고문관들이 참석해 육군회관 낙성식 파티가 깊은 밤까지 개최되었다. 참석자의 일부는 ‘태화관’이란 요정으로 옮겨 새벽까지 2차 술판을 벌였는데, 스폰서는 후일 간첩죄로 사형당한 군납업자 鄭國殷(정국은)이었다. 이에 더하여 1주일 전에는 노후한 무기 및 차량을 수리하기 위해 富平(부평)의 무기보급처에 집결시키기로 되어 있어 각 부대는 장비의 3분이 1을 후송해 놓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북한군의 기습 남침을 당한 국군은 혼란, 바로 그것이었다. 군의 수뇌부에는 심야 파티의 후유증으로 인해 좀처럼 연락이 닿지 않았다. 軍令權(군령권)을 가진 蔡秉德(채병덕) 육군참모총장에게 제1보가 들어간 시각은 남침 후 2시간이나 흐른 오전 6시였다.

오전 6시30분, 육본은 全軍(전군)에 비상소집을 발령했다. 이것이 전쟁 중의 작전명령 제1호였다. 陸本에의 등청은 늦어지고 일부 간부는 宿醉(숙취)의 모습으로 등청했다. 육본 작전참모가 육본에 달려온 시각은 오전 9시30분경이었다. 기습 남침의 효과는 100%였다.

남침 4시간 후인 오전 8시, 蔡 총장은 예비사단인 제2사단, 제3사단, 제5사단에 대해 서울에 집결할 것을 명하고, 오전 11시에는 수도경비사령부의 제3연대를 의정부의 제7사단에 배속시켰다. 오전 10시, 李承晩 대통령에게 북한군의 남침이 보고되었다. 

오후 2시에는 남침 후 첫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蔡 총장은 38선 全域에 걸친 북한군의 침공을 인정하면서 후방의 사단을 진출시켜 반격에 의해 대처 가능하다고 보고했다. 국민들에게는 이미 오전 7시 라디오를 통해 북한군의 남침 사실이 보도되었다. 정오 무렵, 敵 공군기 4대가 서울로 날아와 기총소사 및 폭탄 투하로 서울시민을 공포에 빠뜨렸다. 이 때문에 국방부는 오후 1시에 처음으로 공식담화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북한군의 침공을 밝히면서도 국군의 건투를 전하고, 全국민이 평정을 지키도록 호소했다.

이는 국민들에게 불안을 주지 않겠다는 배려였겠지만, 그 후에도 되풀이된 이런 보도는 국민의 판단을 헷갈리게 하여 서울 失陷 時(실함 시)의 대혼란 등 많은 문제를 남기게 된다. 이처럼 정부·국군·국민도 혼란과 흥분의 와중에 있었다. 이런 가운데 제1선에서는 국군의 死鬪(사투)가 거듭되고 있었다.

국군 제1·제6·제8사단의 분전
 
제1선 부대는 즉시 외출·휴가 중인 병사들을 소집, 모이는 대로[逐次(축차)] 전선에 투입하고 있었지만, 이 때문에 부대의 建制(건제)가 무너지고 말았다. 여기에서 虛(허)를 찔린 부대의 혼란상이 엿보인다. 그래도 제1사단·제6사단·제8사단은 압도적인 북한군의 맹공에도 견뎌내며 전선의 붕괴를 막아내고 있었다. 옹진반도의 제17연대도 잘 버텼으나 병력·무기의 차는 어쩔 수 없어 육본의 명령에 따라 해상을 통하여 철수했다.  
 
開城(개성)·汶山(문산) 지구의 제1사단은 延安(연안)으로부터 高浪浦(고랑포)에 이르는 90km의 넓은 정면을 담당하고 있다가 북한군 제6사단과 제1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서쪽 정면인 연안-개성 지구에서는 기습을 받아 진지를 방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부대를 임진강 左岸(좌안, 상류에서 볼 때 왼쪽 강변)의 主진지로 물러나 북한군의 맹공을 일단 저지했다. 그 후 이 主진지가 붕괴의 위기에 처하면 다시 후방 奉日川(봉일천)의 예비진지로 들어가 저지작전을 계속했다.

이것은 6·25동란 2개월 전에 제1사단장으로 부임한 백선엽 대령이 학생 및 시민들의 협조를 얻어 이들 지역에 비록 간단한 것이긴 하지만 진지를 구축해 놓고, 대대 훈련까지 실행했던 결과였다. 제1사단은 6월28일 정오까지 버티다가 서울이 적에게 함락되자 退路(퇴로)가 끊길 것을 우려, 幸州(행주)나루와 梨山浦(이산포)에서 漢江(한강)을 도하하여 6월29일 동틀 무렵 한강 南岸(남안)의 방어를 맡은 始興(시흥)지구전투사령부(金弘壹 소장)에 도착했다.
 
한반도 중앙부에 포진한 제6사단은 예하 7연대(任富澤 대령)를 春川(춘천)에, 2연대를 인제·홍천에 배치하고, 제19연대는 豫備(예비)로 해서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原州(원주)에 주둔시켰다. 제7연대에 배속된 제16포병대대는, 북한강 계곡(5번 국도)을 따라 SU-76자주포를 앞세워 진격해 오는 敵 제2사단을 먼저 불의에 집중포격을 가해 사기를 꺽은 데 이어 보병의 육박공격으로 적을 여러 차례 격퇴했다.    
  
6사단의 포병은 실은 김성 소령의 1개 대대뿐이었다. 포는 105mm 곡사포 15문, 그중 3문은 고장이었다. 만약 이 포병들이 흩어져 있었다면 남침과 함께 즉각 대응한 포병의 눈부신 활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당시 7연대 중대장이었던 李大鎔 장군의 회고). 다행스럽게도 김성 포병대대장은 6·25 발발 하루 전날 훈련을 위해 그때까지 분산되어 있던 3개 포병중대의 곡사포 12문을 소양강 북쪽 牛頭洞(우두동)에 집결·放列(방열)해 두었던 것이다.

제1대대 제2소대장 沈鎰(심일) 중위는 도로변 民家(민가)에 대기 중 敵의 자주포가 가까이 다가오자 對(대)전차포를 쏘아 그 중 2량을 격파했다. 164고지와 우두산에서 이를 지켜보던 국군 장병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이렇게 적의 제2사단이 고전하자 북한군은 인제로부터 洪川(홍천)을 향해 진격 중이던 제12사단 주력을 춘천 정면으로 돌려 28일 간신히 춘천을 점령했다. 이것은 6월25일 중에 춘천을 점령하고 한강을 따라 서울 남방의 水原(수원)으로 돌진해서 제1군단과 함께 국군 주력을 서울의 남북에서 섬멸한다고 하는 계획을 크게 빚나가게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북한군 제2군단장 김광협 중장은 참모장으로 격하되고, 포병사령관이던 金武亭(김무정)이 2군단장이 되었다. 북한군 제2사단장 李靑松(이청송)도 경질되었다.

동해안의 한국군 제8사단(李成佳 대령)은 38선 부근 注文津(주문진)의 제10연대와 그 남방 삼척의 제21연대 사이에 북한군 유격대가 해상으로부터 상륙함으로써 일시 퇴로가 차단당하는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사단장의 과감한 지휘로 질서정연하게 후퇴하고, 그 후 태백산맥의 지형을 활용하여 敵의 빠른 진격을 막았다. 


T34탱크에 유린된 의정부 정면

국군 제7사단(사단장 유재흥 대령)은 서울 방위의 핵심 통로인 의정부 전선에서 절망적인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제7사단의 방어구역에는, 연천으로부터 東豆川(동두천)을 거쳐 議政府(의정부)에 이르는 3번 국도와 鐵原(철원)으로부터 抱川(포천)을 거쳐 의정부에 이르는 43번 국도가 달리고 있고, 이 두 개의 도로가 의정부에서 3번 국도로 합류하여 서울로 연결되고 있다. 동두천 연도는 평야지대이고, 포천 연도는 廣州山脈(광주산맥)의 기슭을 타고 달리다 祝石嶺(축석령) 고개에 이르러 의정부까지 내리막길을 이루고 있다.

제7사단은 제1연대에게 동두천 지구를, 제9연대에게 포천 지구를 방어하게 했다. 6월의 부대 개편에 의해서 제7사단에 소속되어 있었던 제8연대는 수도사단으로 전출했고, 그 대신에 예하로 들어오게 되어 있던 제25연대는 아직 충남 온양에 머물고 있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정면을 책임진 제7사단은 그 예하에 2개 연대밖에 없었고 진지도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

북한군은 동두천 정면에 제4사단(소장 이권무), 포천정면에 제3사단(소장 이영호)을 지향시키고 제각기 제107전차연대와 제109전차연대(대좌 최우식)를 배속시켰다. 두 전차연대는 105전차여단의 예하로서 그 연대장 둘은 모두 소련 거주 韓人 2세인데, 전차병으로 1941년 獨蘇(독소)전쟁에 참여한 자들이다. 소련製(제) T34탱크는 의정부 正面(정면)을 유린했다. 

수년 전, 필자는 중국 內몽골의 시라무렌江 상류의 초원을 달려 遼(요)제국의 발상지 巴林左旗(파림좌기)를 찾아가던 도중 巴林右旗(파림우기)에 우연히 들렀다가 그 중심 광장에 설치된 抗美援朝(항미원조, 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도움) 기념 전시물을 통해 몽골인 戰車兵(전차병)이 6·25 남침에 참가한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1939년의 滿蒙(만몽)국경지역의 노몽한 전투에서 소련-몽골 연합군의 주코프 장군은 기병과 포병으로 일본 關東軍(관동군)의 1개 사단에 궤멸적 타격을 가했던 바 있다.

몽골인 전차兵은 그 무렵부터 소련으로부터 상당 수준의 탱크 전술을 습득하여 6·25 때 북한군의 탱크부대에 대거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군의 최정예인 제105전차여단은 서울 점령 후 전차사단으로 승격했다.

 

[ 2013-06-18, 11:2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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