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란트 서독수상은 동독을 두 번 가지 않았다

서독의 동방정책의 원칙과 교훈: '자격'과 '장소'를 달리하는 盧대통령의 '창의적 해법'을 촉구한다.
브란트 서독수상은 1970년 3월19일 동독 에어후르트(Erfurt)를 방문하여 슈토프 동독수상과 제1차 정상회담을 했다.

2차 정상회담은 동독의 슈토프 수상이 서독을 방문하여 캇셀(Kassel)에서 1970년 5월21일 개최되었다. 1차 회담에서 합의한 여러 후속 합의사항 중에 유일한 구체적인 2차 회담 개최 원칙이 1차 회담 후 2개월 만에 실현된 것이다.

2차 회담에서 브란트 수상은 1972년 12월21일에 체결된 ‘기본조약’의 20개 항목을 제시했다. 동독이 여전히 ‘2개 주권 인정’을 요구하는 가운데 진행된 2차 회담은 1차에 비해 상당히 경직된 분위기였고, 결국 구체적인 결실을 전혀 가져오지 못한 채 단지 다음 정상회담까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데에만 의견 일치를 보았다.

3차 회담은 무려 9년이 지난 1981년 12월11일 동독 휴양지 베어벨린제(Werbellinsee)에서 개최되었다. 물론 브란트도 슈토프도 아닌 서독은 슈미트수상, 동독은 호네커 국가평의회 의장이었다. 이 회담에서 슈미트 수상은 호네커를 서독으로 초청했다.

4차 회담은 6년 후 1987년 9월7일 국가평의회 의장 겸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 호네커는 당시 서독의 수도인 본(Bonn)을 방문하여 콜 수상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물론 서독 대통령 폰 바이츠세커와의 회담도 있었다.

햇볕정책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DJ, 북한의 개방을 외치는 노무현대통령, 심지어 한나라당의 신대북정책을 입안한 정형근의원까지 모두 자신들의 이론적, 경험적 근거로 들먹이는 것이 바로 ‘서독의 동방정책(Ostpolitik)’이다. 그런데 해석과 적용이 요지경이다. 왜?

서독의 동방정책의 원칙과 교훈

1. 브란트 수상은 동독의 수도 ‘베를린’을 찾아 가지 않았다.
아무 역사적 정치적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도시 ‘에어푸르트’에서 역사적인 정상회담이 열렸다.

2.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할 때까지 4차례의 정상회담이 있지만 한 번도 서독수상이 동독의 ‘수도 베를린’을 방문하지 않았다.

3. 서독 수상이 동독에 한 번 가면, 동독 정상도 반드시 서독을 답방하였다.

4. 동서독 정상이 만난 합의한 사항은 다음 정상이 바뀌어서도 그대로 지켜졌다.

5. 서독은 1972년 12월21일 ‘기본조약’, 1973년 9월 18일 ‘유엔동시가입’, 1978년 11월 29일 국경선분쟁을 종식시킨 ‘국경선의정서’체결 등 그 어떤 동서독 합의서에서도 한 번도 동독을 ‘주권국가’로 인정하는 ‘서명’을 한 적이 없다.

즉 ‘전 독일인을 대표하는 정통성은 서독정부에만 있다’는 서독 기본법의 ‘원칙’을 통일 순간까지 끝까지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6. 브란트 수상의 ‘1민족 1국가 2 정부’라는 동방정책의 기본원칙은 이후 같은 사민당 슈미트 정부, 당을 달리 하는 기민당의 콜 정부에서도 변함없이 지켜졌다. 그 결과 1987년 호네커 서기장은 서독의 수도인 ‘본(Bonn)’을 방문하게 된다.

어떻게 노 대통령은 1차 ‘평양’ 회담에서 ‘서울 답방’을 약속 어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러 두 번씩이나 대통령 자격으로 ‘평양’을 가고자 하는가 ?

굳이 간다면 ‘자격’과 ‘장소’를 달리 하는 ‘창의적 해법’을 고려해 보시길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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