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눈물

  영화 <카틴>을 봤다. 1940년 소련 비밀경찰이 소련군의 포로가 된 폴란드군 장교 등을 대거 학살한 ‘카틴 숲 사건'을 다룬 폴란드 영화다. ‘카틴 숲의 학살’ 은 1939년 히틀러와 밀약을 맺고 폴란드를 분할 점령한 소련의 스탈린이 폴란드군 장교들은 물론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지식인 등 폴란드 사회의 엘리트들을 스몰렌스크 인근의 카틴 숲에서 학살한 사건. 당시 스탈린은 비밀경찰 두목 베리야에게 “폴란드가 다시는 독립된 국가로 일어설 수 없도록 폴란드 엘리트의 씨를 말리라”고 지시했다 (6.25 당시 영광 대학살 등 북한공산집단이 자행한 우파 인사들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사건은 1943년 독일군이 카틴 숲에서 학살된 폴란드군의 유해 4000여 구를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소련은 이 사실을 부인하면서 나치 독일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웠다. 소련은 심지어 영국에 있던 폴란드 망명정부가 이 사건에 대해 항의하자 이를 폴란드 망명정부와의 국교(國交)를 단절하는 기회로 삼았다.
  소련이 이 사건이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하고 폴란드에 사과한 것은 소련이 붕괴하기 직전인 1990년 고르바초프 정권 시절에 이르러서였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 움츠러들었던 러시아가 다시 기를 펴던 2005년 러시아군 최고검찰관은 “국가적, 국제법적 차원에서 볼 때 카틴 숲 사건은 폴란드인을 대상으로 한 대학살(제노사이드) 사건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내가 ‘카틴’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고교 시절, 솔제니친의 미국 순회강연연설을 다룬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의 전망’이라는 책에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에서 솔제니친은 대량학살을 자행하고도 수 십 년 동안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소련공산정권의 거짓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나는 <망명군>이라는 책에서 다시 '카틴'을 만났다. <망명군>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 전선 등에서 용명을 떨쳤던 W.안데르스 장군의 회고록. 이 책에는 소련군의 포로가 됐던 自國 장교들의 대량학살 소식을 접하고 분노하면서도 나치와의 전쟁 상황 속에서 연합국과의 관계 때문에 이를 국제사회에 충분히 호소할 수 없었던 약소국의 슬픔이 잘 나타나 있다.

영화

영화는 1939년 9월 나치 독일군의 침공을 피해 동쪽으로 달아나는 폴란드 피난민 행렬로부터 시작된다. 다리를 건너던 이들은 곧  “소련이 쳐들어왔다”,“러시아놈들이 쳐들어왔다”고 외치며 동쪽에서 밀려오는 피난민 무리와 맞닥뜨린다.
 동쪽으로 갈 수도 없고, 서쪽으로 갈 수도 없어 우왕좌왕하는 피난민들 가운데는 대위 안제이의 부인 안나도 있다. 하지만 안나는 곧 동부전선에 있는 남편을 찾아 나서고, 얼마 되지 않아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동료 장교들과 함께 이송을 기다리고 있는 남편 안제이를 만난다.

“집으로 돌아가 함께 살자”고 가망 없는 호소를 하는 안나에게 안제이는 동료 장교들을 가리키며 “나는 군에 선서를 한 몸”이라고 말한다. 포로수용소로 이송된 안제이는 동료들과 언제 석방될지 모르는 무료한 나날을 보낸다. 그리고 이듬해 봄, 그는 호명된 동료 장교들과 함께 수용소를 떠난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해 즐거워하고, 수용소에 남은 장교들은 그들을 부러움 섞인 눈으로 바라본다.

한편 크라코프 대학 교수인 안제이의 아버지는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 수용됐다가 病死(병사)한다.
 그리고 3년 후, 나치 독일은 카틴 숲에서 소련에 의해 학살된 폴란드군의 屍身들을 발굴했다고 발표한다. 나치는 방송과 신문을 통해 피학살자들의 명단을 발표하면서 소련의 만행을 규탄한다. 안제이의 아내와 어머니는 신문에 난 명단에 안제이의 이름이 없다는 사실에 애써 안도한다.

카틴에서 학살된 한 장성의 아내는 나치로부터 심심한 위로와 함께 남편에게 히틀러가 수여한 훈장을 전달받는다. 나치는 그녀에게 소련의 만행을 규탄하는 선전방송을 할 것을 종용한다. 불응할 경우 딸을 강제수용소로 보내겠다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또 다른 침략자인 나치에게 협조하기를 거부한다. 

  학살의 현장

다시 2년 후. 나치는 패망하고 소련군이 폴란드를 해방(?)시킨다. 소련군은 “카틴 숲의 학살 사건은 나치의 소행”이라고 선전한다. 1943년 나치 점령 하에서 카틴 숲 학살 사건을 조사했던 의학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사라지고, 소련의 선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가톨릭 신부는 비밀경찰에 체포된다. 소련군 휘하 폴란드인 부대의 장교가 되어 돌아온 안제이의 부하 예지는 진실을 말하지 못해 괴로워하다가 자살한다.

유가족들의 행보는 엇갈린다. 카틴에서 학살당한 한 항공기엔지니어의 누이동생은 자기의 오빠가 1940년 소련에 의해 키틴 숲에서 살해됐다는 내용의 碑文을 만들었다가 비밀경찰에 체포된다. 하지만 그 엔지니어의 애인은 소련 점령 하의 새 질서를 받아들이면서 공산당에 입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안제이의 아내 안나에게 남편의 일기장이 전해진다. 1943년 카틴 숲 현장을 조사했던 의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전해 준 것이다. 여기에는 1940년 봄 소련의 포로수용소를 떠난 후의 행적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스몰렌스크 인근의 한 역에 열차가 도착하는 것으로 일기는 끝나지만, 영화는 그 이후의 학살 과정을 보여준다.
  검은 색 밀폐트럭에 실려 숲 속으로 실려 간 폴란드군 장교들은 한 사람씩 끌려나온다. 장성 등 고급 장교들이 숲 속에 있는 한 건물의 지하 밀실로 끌려들어가는 순간,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비밀경찰이 그의 뒤통수에 권총을 쏜다. 屍身이 배출구를 통해 밖으로 내보내지면 비밀경찰은 물을 부어 핏자국을 없앤다. 그 뒤를 이어 다른 폴란드군 장교가 들여보내진다. 바닥에 있는 핏자국을 보면서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순간, 그의 뒤통수에는 총알이 박힌다. 
  나머지 장교들은 거대한 구덩이 앞으로 끌려 나와 차례로 뒤통수에 총알을 맞고 쓰러진다. 죽음 앞에서 뒷걸음질치다가 총알을 맞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마지막 기도를 올리다가 기도를 끝맺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학살을 자행하는 비밀경찰의 얼굴은 섬뜩할 정도로 무표정하다. 마치 호치키스를 박듯이, 혹은 천공펀지로 서류뭉치에 구멍을 뚫듯이, 희생자가 자기 앞에 끌여 오면 뒤통수에 총알을 박는다. 안제이도 그렇게 목숨을 잃고 구덩이 안으로 굴러떨어진다. 희생자들의 屍身 위로 불도저가 흙을 덮는다. 

 ‘진실’과 ‘정의’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 

 영화 <카틴>을 보는 동안 내내 우울했다. 폴란드 포로들의 운명이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학살된 폴란드군 장교들의 운명에 가슴이 아팠다. 조국을 둘러싼 강폭한 두 강대국의 침공을 받아 어쩔 줄 모르다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소련군의 포로가 된 그들, 그래도 언젠가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 하나로, 혹은 다시 무기를 들고 침략자들과 싸울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로 무료한 수용소 생활을 이겨나가다가, 異域의 숲 속에서 어이없이 죽어간 그들.  
 그보다 더 가슴이 아팠던 것은 나치가 물러간 이후 소련군의 점령 아래서 침묵을 강요당해야 했던 폴란드인들의 운명이었다. 1939년 조국을 분할 점령했던 두 강도 가운데 하나는 무너졌지만, 다른 강도가 나라 全域을 점령한 상황 아래서 그들은 카틴 숲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이 45년간 계속됐다.
 영화 <카틴>은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 부부의 후원 아래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마 푸틴 집권 이후 석유 수출로 인한 경제회복 등에 힘입어 과거의 소련제국의 위세를 회복해 가는 러시아가 다시 ‘카틴’의 진실을 외면하는 데 대한 항변이리라.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진실’과 ‘정의(正義)’에 대해 생각했다. 소련 공산주의자들이나 거기에 굴종한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에게 ‘정의’는 공산주의였다. 그들은 ‘공산주의’라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 진실을 외면, 아니 왜곡했다. 진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정의는 ‘가짜 정의’에 불과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김현희 사건 - 일그러진 ‘정의’를 위해 ‘진실’ 왜곡한 좌파들

 이념으로 일그러진 ‘정의’를 위해 진실을 왜곡하는 사례는 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KAL858기 사건에 대한 좌파들의 끊임없는 왜곡시도다. 1987년 KAL858기 폭파사건 직후부터 북한 공산집단과 그들을 추종하는 주사파 집단은 ‘의혹’을 제기하면서 진실을 왜곡하려 시도해 왔다. 음지에 머물던 그러한 시도는 김대중-노무현 좌파 정권 아래서 정권의 지원 아래 양지로 올라왔다. 몇몇 가톨릭 신부들이 총대를 메고 앞장을 섰고, 어용방송들이 의혹을 부풀리는 데 협력했다. 노무현 정권의 국가정보원은 ‘과거사 청산’이라는 명분 아래 이러한 행위들을 암묵적으로, 혹은 노골적으로 지원했다. 국가, 아니 정권이 나서서 김현희를 회유하거나 위협해 진실을 왜곡하려 했다. 김현희와 그의 남편은 여기에 맞서 처절하게 싸웠다.
 이 날조극에 등장하는 주연, 조연들 가운데 내가 가장 고약하게 생각하는 것은 몇몇 가톨릭 신부들이다. 그것은 그들이 진실을 왜곡하면서 감히 ‘정의구현사제단’을 사칭(詐稱)하고 있기 때문이다.

 李穗根 사건의 진실 밝힌 趙甲濟

 자기들의 ‘정의’인 이념을 위해 진실을 왜곡하는 좌파들과는 정반대의 사례가 있다. 李穗根 위장간첩사건의 진실을 밝혀낸 趙甲濟 전 월간조선 편집장 얘기다.  이수근 위장간첩사건은 1967년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을 지내다가 판문점을 넘어 귀순했던 이수근이 1969년 한국을 탈출하려다가 체포되어 처형된 사건. 이 사건은 오랫동안 거물간첩 이수근이 귀순을 가장해 국내로 침투했다가 정체가 발각되려 하자 해외로 탈출하려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 밝혀낸 분이 趙甲濟 전 편집장이다. 그는 1980년대 후반, 사건 당시 월남 탄손누트 공항에서 이수근을 체포해 한국으로 압송하는 지휘자였던 李大鎔 전 駐越공사로부터 지나가는 말로 “이수근 사건은 알려진 것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얘기를 듣고 이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 1989년 월간조선 3월호에 <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기사를 썼다.
 이 기사에서 趙 전 편집장은 북한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대한민국을 선택했던 이수근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이 땅을 벗어나려다가 실패하고 간첩으로 몰려 죽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趙 전 편집장은 李穗根 사건에 연루돼 21년간 복역했던 처조카 裵慶玉씨의 기구한 사연도 소개하였다. 
 배경옥씨가 과거사위원회에 문제를 제기해 진상규명결정을 얻어낸 후, 법원에 재심신청을 하자, 趙 전 편집장은 법원에 증인으로 나가 이수근 사건의 진실과 배경옥씨의 무고함에 대해 증언했다. 이수근 사건의 진실을 밝혀낸 것은 과거사위원회가 아니라 조갑제 전 편집장이었다.

 조갑제 전 편집장은 좌파 정권 아래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옹호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도 애써 온 분이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등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을 재조명하는데 앞장서 온 분이다. 김정일 집단과 그 추종세력에 대해 누구보다도 완강하게 맞서온 분이기도 하다. 그런 그 분을 두고 혹자는 ‘극우(極右)’라고 한다. 이수근 사건은 과거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가 한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 죽인 사건이다.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권력기관의 위세 아래 진실을 밝혀내지 못하고 그를 죽게 만든 부끄러운 사건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 사건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혀내는 것은 자칫하면 중앙정보부 등 과거 공안기관들이 취급했던 대공(對共)사건들 전반에 대해 조작의혹을 확산시켜 공안기관들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조갑제 전 편집장이 그렇게 공들여 재조명했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누가 될 수 있는 일이다.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치부(恥部)를 드러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이를 두고 북한공산집단과 좌파들이 선전공세를 취할 수도 있는 일이다. 
 趙甲濟 전 편집장이 ‘극우’라면, ‘수구꼴통’이라면, 그는 진실을 알면서도 이수근 사건의 진실에 대해 입을 다물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보수잡지, ‘수구꼴통잡지’ 월간조선의 지면을 통해 진실을 이야기 했다. 그는 이수근 사건의 무고한 희생자 배경옥이라는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최선을 다했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진실’이었다. 남들이 보기에 ‘극우 조갑제’의 ‘정의’는 대한민국과 박정희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정의’를 위해 ‘진실’을 희생시키지 않았다 (물론 여기서 조갑제 전 편집장은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이수근을 못살게 굴고 진실을 조작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지, ‘박정희 정권’이나 ‘대한민국’, 혹은 ‘대한민국 중앙정보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2008년12월 법원의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배경옥씨는 “사건이 조작됐다고 보도해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킨 조갑제 기자에게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수근 사건뿐이 아니다. 조갑제 전 편집장을 아는 기자들은 말한다. “조갑제 기자는 이념과 사실이 충돌할 때는 사실을 선택하는 사람”이라고. 

 좌파와 우파의 차이

 나는 여기서 좌파와 우파의 차이를 본다. 카틴 숲 사건이나 KAL858기 사건에서 보듯이, 좌파는 이념, 곧 자기들이 ‘정의’라고 믿는 바를 위해서는 ‘진실’을 왜곡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이를 위해 그들은 과장된 선전선동과 책임轉嫁(전가)를 일삼는다. 반면에 우파는 이수근 사건의 진실을 밝혀낸 조갑제 전 편집장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념 내지 정의가 진실(사실)과 충돌할 때는 진실을 선택한다.  물론 모든 우파가 조갑제 전 편집장 같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우파는 ‘진정한 우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갑제 전 편집장의 경우처럼 진실을 앞세우는 우파가 ‘진정한 우파’이고, 우파가 지향해야 하는 모델이다. 작가 김훈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위에 정의를 세울 수는 있어도, 정의 위에 사실을 세울 수는 없다.”
 우파가 사실 위에 정의를 세우는 사람들이라면, 좌파는 정의 위에 사실을 세우려는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