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정권下 國情院의 奮鬪(분투): 송두율 체포


북한노동당원 宋斗律의 자백을 받아낸 것은, 미국으로 탈출한 북한 공작원 김경필의 컴퓨터 디스켓 再生 기록

국정원 工作 秘話 - 북한노동당원 宋斗律 기획入國사건의 심층(월간조선 2004년 1월호)

북한노동당원 宋斗律의 자백을 받아낸 것은, 미국으로 탈출한 북한 공작원 김경필의 컴퓨터 디스켓 再生 기록

禹 鍾 昌 月刊朝鮮 부장대우


국정원, 통전부 유럽 공작원 김경필의 컴퓨터 기록 입수

베를린에 있는 북한의 이익 대표부 김경필(58·가명)은 부부 동반으로 근무 중인 통일전선부 소속 서기관이었다. 그는 1998년 현재로 3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그의 임무는 독일을 중심으로 한 스위스,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 유럽 각국의 한국 교포 사회 공작이었다. 한국 교민들 속의 親北단체와 인사들을 관리하면서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선전하고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며 북한 정권을 홍보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는 많은 親北인사들을 포섭하였고 미국 교민사회에도 손을 뻗쳤다. 그의 중요 임무 중의 하나는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인 宋斗律과 연락하고 그를 나름대로 조정 관리하는 일이었다.

1998년 그는 독일의 경제 중심지 프랑크푸르트 교민 C씨로부터 고충을 들었다. 이 교민은 출판·인쇄업에 종사하면서 김경필 서기관과 협조하는 親北인사였다. C씨는 자신의 컴퓨터가 고장났다면서 하나를 새로 사야겠는데 도와줄 수 없느냐고 말했다. 마침 김경필은 자신의 PC가 낡아 바꿀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내 컴퓨터를 쓰라』고 하면서 주겠다고 말했다.

김경필은 컴퓨터를 건네 주기 전에 하드 디스크에 들어 있는 기록을 전부 지웠다. 김경필의 PC를 넘겨받은 C씨는 어떤 경로를 거쳐 이 컴퓨터에 내장되어 있다가 김경필이 지운 기록을 재생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컴퓨터 디스켓 기록은 고스란히 우리 국정원 현지 요원 앞으로 넘어왔다. 이 기록은 김경필의 유럽 공작 상황을 자세히 담고 있었다. 정보기관으로서는 최고의 특종이었다. 김경필은 PC에 일단 入力된 자료는 쉽게 재생된다는 것을 모르는 이였다.

1998년 12월 김경필은 평양의 통일전선부로부터 한 달 안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김경필은 귀환 시기가 아닌데 왜 갑자기 돌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는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익대표부 대사 등 직원들이 자신을 보는 눈도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 사실이 평양에 알려진 것이 아닌지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이번에 돌아가면 처벌을 받을 것이란 예감이 자꾸 들었다는 것이다.


유럽의 美 대사관 망명, CIA 관리로 넘어가다

이때 국정원 유럽 공작부서로부터 연락이 왔다. 김경필을 만난 국정원 요원은 김경필의 활동내역이 소상히 실린 컴퓨터 디스켓 이야기를 꺼내면서 단도직입적으로 한국으로 귀순할 것을 권했다. 귀순하지 않으면 북한 쪽으로 정보를 흘려 파멸시켜버리겠다는 뜻도 내비쳤을 것이다.

겁을 먹은 김경필은 며칠 뒤 부인 金모씨(56세)와 함께 자동차 편으로 유럽의 제3국으로 달려가 미국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 1999년 1월 그는 미국의 CIA로 신병이 넘어갔다. 약 5개월에 걸쳐 그는 신문을 받았다. 그는 유럽에서의 활동상을 자세히 설명했다. 독일 정보기관(BND)에서도 사람을 보내 김경필 부부를 신문했다. 미국 CIA는 이 신문 과정에서 김경필로부터 「宋斗律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인 김철수이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김경필은 처음에 「송두율은 평양의 통전부에서 직접 관리한다」고 말하면서 적극적인 진술을 꺼렸다고 한다. 韓美간의 정보교류 협정에 따라 국정원도 요원을 보내 김경필 부부를 신문했다.

김경필 부부는 미국으로 망명할 때 컴퓨터를 가져 가지 않았지만 활동상황에 대한 진술을 통해서 유럽 교민들 속으로 파고든 북한의 공작 상황과 親北인사들의 명단을 많이 털어놓았다.


신문받으면서 자식 생각에 눈물

김경필 부부가 왜 국정원의 공작방향대로 한국으로 가지 않았느냐가 궁금하다. 김경필은 한국에 북한 공작원들과 親北인사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어 매우 위험하다는 판단을 하고 미국行을 택했다고 한다. 김경필은 또 남북한 정보기관 사이에 그 어떤 內通채널이 있다는 심증을 내비쳤다고 한다.

김경필 부부는 살기 위해 탈출하느라고 평양에 두고 온 아들, 딸을 생각하면서 신문 중에도 많이 울었다고 한다. 이 부부는 지금 신분을 바꾸고 취직까지 하여 미국 CIA의 보호 속에서 살고 있다. 情報源(정보원)에 대한 이런 보호는 두 부부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미국 CIA는 김경필을 통해서, 금강산 관광 등 모든 對南사업을 통전부에서 관리하는데 그 主목적은 돈벌이가 아니라 남한 적화를 위한 내부 교란, 親北 교두보 확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국정원, 黃長燁 재판자료로 제출하지 않아

한편 김경필이 남긴 컴퓨터 기록을 입수한 국정원은 김경필이 宋斗律을 조정하고 관리한 연락책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宋斗律과 관련된 연락 기록, 대담록 등이 디스켓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국정원에선, 1998년 8월호 月刊朝鮮의 특종보도(「宋斗律은 북한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다」) 이후 宋斗律씨가 발설자 黃長燁씨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자 김경필의 디스켓을 증거자료로 제출하느냐를 놓고 고민하다가 내지 않는 쪽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만약, 재판의 결과에 집착해 국정원이 그때 디스켓 기록을 재판부에 냈더라면 宋斗律씨는 귀국을 포기했든지 준비를 하고 왔을 것이다.

이번에 宋斗律씨가 국정원의 아주 느슨한 출퇴근 조사에서 너무나 빨리 자신의 북한 노동당 입당과 정치국 후보위원 임명에 대해 자백한 것은 국정원이 들이민 김경필의 디스켓 파일의 내용과 미국 망명 후 김경필이 진술한 내용이 너무 구체적이라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번에 국정원이 김경필을 宋斗律씨와 대질시켰다고 보도하였으나 실제로 신문조서를 남긴 사람은 유럽에서 활동 중 귀순한 북한의 다른 공작원 최모씨라고 한다. 최모씨 또한 宋斗律의 활동상을 아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김경필의 기록을 보완하는 증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은 宋斗律 사건 수사기록을 검찰에 넘길 때 김경필의 컴퓨터 디스켓 기록도 첨부하여 놓았기 때문에 그 全文은 재판 과정에서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북한은 1999년 1월19일과 26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성명과 진상공개장을 통해 『한국 안기부가 김경필을 납치했다』고 주장했고, 그해 3월에는 유엔주재 북한대표부가 납치 주장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북한은 『한국의 안기부가 「최○○」이라는 사람을 범민련 유럽지역 본부에 침투시켜 金씨의 컴퓨터 입력자료를 뽑아 냈고 그것을 협박수단으로 삼아 「한형수」라는 사람이 金씨를 납치했다』고 주장했다.

북측은 『한씨가 金씨를 납치하기 직전 金씨에게 1997년에 작성한 업무내용 100여 개의 목록을 협박용으로 제시하며, 북한 공작원 명단을 넘겨 달라고 요구했다』면서 『두 사람이 만나는 행적을 추적해 왔으며 1999년 1월18일자로 金씨에 대해 귀국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고위 정보소식통은 『宋斗律은 1997년 1월 黃長燁씨가 망명하자 그해 2월 베를린 주재 북한 이익대표부 김경필 서기관에게 「黃長燁이 내가 노동당 지도기관 성원임을 아는가」하고 물었고 김경필은 이를 평양에 보고하여 지침을 받았다』고 말했다.

며칠 후 북측은 김경필을 통해서 「조국에서는 黃長燁 선생이 (당신이) 당 중앙 지도기관 성원임을 모를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니 모략선전으로 강하게 반박하라」는 지시를 宋斗律에게 내렸다고 한다.

宋斗律을 막다른 골목으로 몬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범민련 유럽본부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면서 宋斗律씨의 공작활동을 알았던 최모씨. 부산 출신인 그도 1999년에 한국으로 귀순했다. 김경필이 컴퓨터를 넘겨주었던 C씨가 최모씨로 추정되는데, 그는 김경필 서기관이 미국으로 탈출하여 최씨가 국정원과 협조관계였음이 알려지게 되자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宋斗律씨는 국정원 수사 과정에서 범민련 가입 사실을 부인했으나 최씨가 가져온 가입원서를 보고 자백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올림픽 개최 반대하는 책 펴내

在獨 사회학자 宋斗律씨가 북한의 거물급 공작원이라는 정보를 國家情報院이 최초 입수한 것은 1982년 9월이었다. 이 정보는 그 무렵 스위스에서 한국으로 귀순한 북한 金正日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 李韓永(1997년 피살)씨가 제공했다. 金正日과 성혜림 사이에 태어난 金正男과 같은 집에서 생활하며 金正日을 수시로 만날 수 있었던 李韓永씨는 金正日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하면서 이렇게 진술했다.

『서독에는 조선노동당 歐洲위원회가 있는데, 그 위원장은 김철수라고 金正日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김철수, 즉 宋斗律씨에 대한 國情院의 추적 조사는 이 진술에서부터 시작되었고, 21년 동안의 끈질긴 조사 끝에 國情院은 宋斗律씨가 북한 권력서열 23위인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임을 확인했다.

宋斗律씨가 북한과 연계된 對南 공작원이라는 사실은 1992년 자수 간첩 吳吉男 사건 때 이미 발표된 바 있다. 당시 안기부는 吳吉男씨 일가를 入北시킨 장본인이 宋斗律씨라고 발표했다. 안기부는 발표문에서 「宋斗律은 1991년 5월10일부터 5월30일까지 入北, 金日成을 면담하고 주체사상을 찬양했으며, 이때의 북한 방문기를 한겨레신문에 3회에 걸쳐 게재하고 북한을 찬양했다」고 적시했다.

이 무렵 작성된 안기부의 「宋斗律 파일」에 따르면 ▲宋斗律씨는 1977년부터 1988년까지 11년 동안 反국가단체인 在日 韓民統 및 북한과 연계된 유럽 지역 좌파 연합조직인 「韓民聯 歐洲상임위원회」회의에 수차 참석하여 「서독과 북한 간의 수교를 주장하고 남한 단독의 유엔 가입을 반대했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방해하기 위해 「평화제전을 할 수 없는 나라-한국」이란 책을 출간했다.

또 ▲1990년 12월 독일 훔볼트 대학에서 유학생과 교수들 대상으로 「남한은 신식민지국가 독점자본주의, 신민주적 반자본주의 국가 등 2개의 학설로 분류할 수 있는 예속 자본주의 국가이고 남한의 노동조건은 세계에서 가장 열악하다」는 취지의 강의를 했고 ▲1991년 북한 사회과학원 초청으로 입북해서는 「수령과 인민의 관계는 사랑에 기초한 것이고 사랑 없는 평등은 사회를 혼란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며 金日性 주체사상을 찬양했으며 ▲1991년 6월 베를린 소재 범민련 해외본부 사무실에서 개최된 「1991년도 범민족대회 준비회의」에 범민련 유럽본부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여 「金日成은 대단히 똑똑한 분이며 북한 주민이 고생하고 있는 것은 인정하나 이는 남북 분단이 빚은 결과로 북한 주민은 이에 따른 어려움을 잘 견디고 있다」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 파일에서 안기부는 宋斗律씨에 대해 「1967년 渡獨 이후 1992년 현재까지 北 고위층의 각별한 신임을 받으면서 극력 親北 활동을 자행하고 있는 자」라고 결론지었다.


사건의 시작은 月朝 특종

「北 고위층의 각별한 신임을 받는 對南 공작원」 宋斗律씨가 「김철수란 가명의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사실은 1997년에 망명한 黃長燁 前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에 의해 최초 공개되었다. 1998년 6월에 출간된 黃長燁씨의 「북한의 진실과 허위」란 책에 처음 거론된 이 내용을 月刊朝鮮이 1998년 8월호 기사에서 특종 보도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黃長燁씨가 쓴 이 책은 북한 동포들이 金日成-金正日 부자의 허위와 기만에 속지 말고 제 정신을 가지고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것을 권고하는 내용이지 宋斗律씨 정체를 폭로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4ㆍ6배판보다 작은 형태로 총 128쪽에 이르는 이 책에서 宋斗律 부분은 반 페이지에 걸쳐 극히 짤막하게 언급돼 있을 뿐이다. 인용하면 이렇다.

<우리는 오랫동안 북한의 중추부에서 일하면서 북한 통치자들에게 기만되어 그들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교포들의 신세가 얼마나 가련한가를 똑똑히 보아 왔다.

예를 들어 나는 독일에 있는 宋斗律 교수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총명하고 박식한 학자이다. 북한 통치자들은 남한의 학생들과 독일에 있는 남한 유학생들을 끌어당기기 위하여,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목적에 이용하기 위하여 그를 「김철수」라는 가명 밑에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하고 金日成이 접견한 사진을 (노동)신문에 크게 보도한 바 있다.

그러면 金正日이 그를 믿고 있는가. 金正日도, 통일전선부 간부들도 그를 믿지 않고 있다. 對南 공작을 하던 李善實(이선실·86)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북한에서 그는 가련한 존재로 되고 있다. 만일 宋斗律 교수가 李善實을 직접 만나서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할 수 있다면 李善實을 통하여 金日成-金正日에게 속아서 한 생을 헛되이 보내고 남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가에 대하여 반드시 듣게 될 것이다>


金日成에 버림받은 간첩 李善實

李善實은 金日成 장례식 때 북한 권력서열 22위로 발표된 고위급 간첩이다. 金日成 장례 당시 宋斗律씨는 李善實보다 권력서열이 한 단계 아래인 23위로 발표되었다. 李善實은 1992년 발각된 남한 조선노동당 간첩단을 총지휘한 여자 간첩이다.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가파리가 고향인 李善實은 1950년 4월에 월북해 노동당 중앙당 금강학원에서 공산주의 사상학습을 받고 황해도 女盟(여맹) 간부를 지냈다. 李善實은 1963년 金日成에게 『조국 통일 사업에 일생을 바치고 싶다』고 탄원, 對南 공작원 교육을 받고 남파되었다.

李善實은 간첩단 사건이 발각되기 직전인 1992년, 北에서 남파한 잠수정을 타고 北으로 탈출했다. 李善實 귀환 공작의 현장 책임자는 귀순한 간첩 김동식이다. 김동식은 要人 암살 및 납치, 테러 전담부서인 사회문화부(지금 명칭은 35호실) 소속 베테랑 공작원이다. 김동식은 國情院의 노련한 유인 공작에 의해 부여의 한 암자에서 검거되었다.

간첩으로 남파돼 대한민국에 조선노동당을 만들었던 전설적인 할머니 공작원 李善實이었지만 金日成-金正日 부자 입장에선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다. 北에 귀환한 李善實이 「찬밥」 신세로 전락하는 것을 黃長燁씨는 눈으로 목격했다. 黃長燁씨는 「북한의 진실과 허위」란 책에서 李善實의 가련한 처지를 이렇게 묘사했다.

<金日成이 새로 건설된 (평양) 광복거리를 돌아보러 나갔을 때 한복 차림으로 참가했던 李善實이 큰 마음 먹고 金日成을 찾아가 큰 절을 올렸는데 金日成은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녀가 물러난 다음 金日成은 수행한 간부들에게 어떤 여자인가 물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목격하고 對南 공작에 동원되는 사람들의 신세가 얼마나 가련한가를 절실히 느꼈다>


宋斗律을 변호하는 民辯

黃長燁 비서가 자기 책에서 宋斗律 부분을 언급한 것은 宋斗律씨도 북한의 허위와 기만에 속지 말고 李善實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우정어린 충고의 일환이었다. 그럼에도 宋斗律씨는 黃長燁 비서가 출판물을 통해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黃비서를 상대로 1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정상인의 눈으로 보면 악랄한 법률투쟁이지만 공산주의자들은 한국의 헌법체제를 파괴하기 위해 그 헌법을 이용한다. 이 소송으로 말미암아 「宋斗律 정체」는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되었다.

宋斗律씨를 비호하는 親北세력과 親北 성향의 일부 언론은 宋斗律 편을 드는 편향적 시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 소송에서 宋斗律씨는 黃長燁 개인만을 상대로 訴를 제기했을 뿐, 黃비서의 책을 인용 보도한 月刊朝鮮에 대해서는 전선의 확대를 우려한 탓인지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宋斗律씨는 이 소송을 「民辯」(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 의뢰했고, 民辯 소속의 安모 변호사가 소송을 담당했다. 民辯은 宋斗律씨 귀국을 적극 추진한 단체 중의 하나다. 宋斗律씨 법정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는 金亨泰 변호사와 宋斗律 비호 발언을 한 康錦實 법무장관은 모두 民辯 출신이다.

國情院은 宋斗律씨에 대한 조사에서 黃長燁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이유를 물었으나 宋씨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國情院 조사 결과 宋씨는 黃長燁씨 망명 후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까봐 우려했으나 북한이 宋씨에게 「黃長燁 비서는 당신이 黨 중앙기관 성원임을 모를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니 모략선전으로 강하게 반발하라」는 지침을 내리자 이에 따른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소송 제기 후 宋斗律씨는 중앙일보와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黃長燁씨가 자기를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고 주장한 데 대해 이런 주장을 폈다.

『1991년 5월 김일성대학에서 黃씨 제자들을 상대로 주체사상 비판 강연을 했다. 또 망명 이후 그의 발언이 너무 粗惡(조악)해 「권투장갑을 끼고 피아노를 치는 느낌」이라고 말했던 게 그의 감정을 건드린 것 같다』

黃長燁씨는 북한에 있을 때 宋斗律씨를 만난 적이 있으며, 宋씨가 1994년 주체사상에 관한 논문을 요구했을 때 개인 비밀연구소에서 만든 자료를 준 적도 있다고 月刊朝鮮과 인터뷰에서 밝혔다. 黃씨는 『한국에서 출간된 宋斗律씨의 주체사상 관련 책은 내가 준 자료를 근거로 쓴 것』이라고 말했다.


「보안상 소스 밝힐 수 없다」

소송이 진행 중이던 1998년 8월21일, 한겨레신문은 사회면 중간 톱기사로 「노동당 간부 김철수와 宋斗律씨는 무관하다」고 보도, 黃長燁씨의 주장을 정면에서 반박했다. 한겨레신문은 독일 본 주재 한국총영사관에서 1989년 작성한 「영사증명서」를 근거로 김철수란 가명을 쓰는 북한 공작원은 조선 노동당 구라파위원장 김성수이지 宋斗律씨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김성수씨는 KBS가 제작한 「한국 사회를 말한다」에 宋斗律, 郭東儀(곽동의·일본 한민통 의장)씨와 같이 등장한 사람이다.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김성수씨는 전남 화순 출신으로 광주高와 연세大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6년 독일로 건너가 간첩 김장현에게 포섭되었다고 한다. 그 뒤 북한에서 간첩교육을 받았고 1970년 국내에 잠입해 활동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 기사가 보도되자 宋斗律씨는 즉각 『독일에 김철수란 가명을 가진 북한 공작원이 두 사람이라는 얘기인데 어느 것이 진짜 김철수인지 黃長燁씨는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라며 역공을 폈다.

이에 대해 國情院은 재판부에 보낸 「사실조회 회신」에서 「宋斗律이 김철수란 가명을 사용하고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백함.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귀순자들의 증언, 외국 정보기관 제공 자료 및 각종 첩보 등 수많은 자료가 있으나 보안상 그 구체적 내용을 일일이 사실조회 회신 형식으로 밝히기 어렵다」고 했다.

이 회신에서 國情院은 「김철수는 宋斗律이 아니라 김성수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김철수 추적 과정에서 國情院도 한때 김철수라는 가명을 사용한 바 있는 프랑크푸르트 거주 김성수를 상기 인물로 추정한 바 있고, 1989년 徐敬元 訪北 사건과 관련, 독일 본 총영사관 작성 영사증명서에도 이같이 작성 본국에 보고하였으나 宋斗律의 1994년 7월과 1998년 2월 訪北 과정에서 입수된 각종 첩보 및 독일 「헌보청」(독일 정보기관)의 동향 자료, 귀순자 증언, 황장엽 진술 등을 토대로 실체 확인 작업을 재개한 결과, 「宋斗律이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인 김철수」란 사실을 명백히 확인하게 되었음.

한편, 프랑크푸르트 거주 김성수는 1998년 8월31일 이와 관련, ▲연륜이나 사회적 지위로 볼 때 비교도 할 수 없는 尹伊桑(윤이상)이 부위원장이고 내가 위원장이 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나는 유럽 民協 결성 이후 조종자도 노동당 구라파위원장도 아니라는 해명서와 함께 ▲영사증명서는 군사 독재정권이 민주인사를 탄압하기 위해 왜곡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在獨 민주인사 음해대책위」 명의의 성명서(1998년 9월5일 발표)를 月刊 「말」誌 및 「인물과 사상」社 등에 발송, 해명해 줄 것을 요청한 바 있음>


宋씨에게 보낸 조의금도 기록

國情院이 서울지검 공안1부(부장 吳世憲)에 보낸 「宋斗律 조사철」에 따르면 宋斗律씨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란 사실을 입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은 독일 주재 북한 이익대표부 2등 서기관 김경필씨와 범민련 유럽본부 사무국장 최창동씨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김경필의 임무 중 하나가 宋斗律씨의 동향을 北에 보고하고 北에서 내려보낸 지침을 그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정보기관의 한 관계자는 『북한과 宋斗律씨 간의 연락책이 김경필』이라고 말했다. 國情院이 검찰에 보낸 「宋斗律 조사철」의 핵심 내용이 김경필이 작성한 PC 기록이다.

이 PC 기록을 통해 國情院은 ▲宋斗律씨가 1991년 金日成을 면담한 이후부터 1995년까지 北으로부터 매년 연구비 명목으로 2만~3만 달러를 수수한 사실 ▲宋斗律씨 부친이 1996년 8월에 사망했을 때, 金正日의 친필 지시에 따라 북한 이익대표부에서 조문을 가고 조의금으로 1500마르크(한국 돈 100만원 상당)를 낸 사실 ▲宋斗律씨가 1996년 이후 북한 정권 창건일과 노동당 창건일, 그리고 金正日 생일 때마다 「장군님의 만수무강을 빈다」는 내용의 충성맹세문을 친필로 작성해 北에 보낸 사실 등을 확인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黃長燁씨 망명 후 신분공개를 우려한 宋斗律씨가 김경필씨에게 자신의 정체를 절대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 사실도 드러났다는 것이다. 자신은 김철수가 아니라며 부인으로 일관하던 송두율씨는 國情院이 이런 자료를 들이밀자 宋斗律씨는 자신이 김철수이며, 북한 권력서열 23위에 해당되는 대접을 받은 것은 맞지만 정치국 후보위원이란 사실을 北으로부터 통보받은 적은 없다는 식으로 후퇴했다고 한다.

범민련 유럽본부 사무국장 최창동씨는 부산대학에서 시간강사를 지내기도 했는데 1994년 독일로 떠나 범민련에 가입했다. 범민련은 1974년 독일 베를린에서 결성된 反정부 단체인 민건회(민주사회건설협의회)가 유럽 民協을 거쳐 1989년 확대 개편된 조직이다. 宋斗律씨는 민건회 회장 출신이다. 범민련은 일본과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는 親北단체들의 총본부로 대법원에 의해 利敵단체로 규정돼 있다.


國情院에서 싱싱한 요리재료를 보냈다

범민련 유럽 본부에서 사무국장을 지낸 최창동씨는 독일 교민사회의 親北化와 독일의 한국 유학생 포섭 임무를 담당했다. 그의 활동 영역 중 상당 부분이 宋斗律씨와 일치했다. 때문에 최씨는 宋斗律씨의 범민련 활동에 대해 가장 정통한 사람이다. 최창동씨는 金大中 정부 시절인 1999년, 전향하고 귀국했다. 宋斗律씨 조사에서 國情院은 최창동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宋斗律 자료철」에도 최창동씨 이름이 등장한다.

宋斗律씨는 國情院 수사관이 범민련 가입 여부를 묻자, 처음에는 부인으로 일관하다가 國情院이 입수한 가입원서를 들이대자 시인했다고 한다. 宋斗律씨를 조사중인 서울지검 공안1부의 한 검사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명을 늘어놓는 宋斗律씨는 전향 의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서울지검의 한 고위 간부는 『宋斗律씨에 대한 國情院의 조사는 치밀하고 완벽했다. 검찰이 할 일은 國情院에서 보낸 싱싱한 요리재료를 얼마나 맛있게 조리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로 구속 후 기소를 기정사실화했다.

宋斗律씨에 대한 검찰 수사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서울지검 공안 1부의 한 관계자는 『宋斗律씨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란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혐의 사실은 거의 확인되었고 남은 것은 宋斗律씨가 1988년 12월호 「사회와 사상」이란 잡지를 통해 발표한 내재적 방법론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친북화시킨지를 파악하는 일이다. 이 조사가 끝나야 수사가 종결될 것이다』고 말했다.

며칠 전, 법무부 과장 한 명이 宋斗律씨 처리에 대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서울지검 공안1부를 방문했다가 逐客(축객) 취급을 받았다. 서울지검 공안1부 검사들의 분위기는 이처럼 서슬이 퍼렇다. 그럼에도 宋斗律씨를 미화하는 일부 언론은 지금도 검찰이 宋씨 혐의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는 式으로 국민을 속이고 있다.●



▣黃長燁 재증언

『宋斗律을 돕기 위해 폭로』

宋斗律씨가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던 지난 10월10일 오전 서울시내 모처의 黃長燁 前 북한노동당 비서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黃 선생은 두 週 앞으로 다가온 訪美 준비 때문인지 다소 피로해 보였다. 보청기를 끼고 난 黃선생과 대화를 시작했다.

―1998년 8월호에 소개된 黃長燁 선생님의 著書가 도화선이 되어 宋斗律 사건이 이렇게 커졌습니다. 그때 왜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가 실은 宋斗律이란 폭로를 하셨습니까.

『그를 도와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북한정권과 관계를 청산하고 돌아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 잠입하여 공작활동을 하고 돌아온 이선실이 金日成에게 외면당하는 걸 구경한 저는 宋斗律씨도 결국은 그렇게 이용만 당하고 말 존재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이선실은 나일론 적삼을 곱게 입고 나와 金日成에게 큰 절을 올렸는데, 金日成이가 주위 사람에게 「저이가 누구인가」라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남조선 혁명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일하고 돌아온 공작원이 그런 대우를 받고 쓸쓸히 사라진다는 것을 宋씨에게 꼭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宋斗律씨는 북한 노동당에 가입한 것은 일종의 입국 절차였다고 설명했는데요.

『노동당 입당이 宋씨의 정체를 아는 데 가장 중요한 사항입니다. 특히 본국으로 불러서 정식으로 입당시킨 해외 교포는 몇이 안됩니다. 그만큼 북한 정권이 宋씨를 신뢰했다는 뜻이고 그럴 만한 공을 세웠다는 이야기지요. 宋씨를 입당시키고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임명한 것은, 남한 인텔리를 끌어들이기 위해 그를 크게 쓰자고 한 거예요. 그게 성공한 것 아닌가요. 宋씨의 제자들이 많이 요직에 진출 했으니』

―黃선생님 때문에 그의 정체가 탄로났으니 북한정권도 그를 버리지 않겠습니까.

『안 버립니다. 절대로. 그의 잘못으로 탄로된 것도 아니고』


『宋斗律 조종자는 통전부 제1부부장 임동욱』

―宋斗律씨는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임명된 사실을 통보받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그럴 수가 없지요. 그 사람을 고무해 주자고 한 것인데』

―북한에 계실 때 宋斗律씨를 몇 번이나 만났습니까.

『김용순 통전부장의 부탁을 받고 만나 오래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용순이가 오더니, 「송두율의 말은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할 수가 없으니 선생님이 좀 가르쳐 주셔야겠습니다」라고 해서 대화한 적이 있어요. 그의 학문적 지식에 대해서는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저의 제자들도 같은 의견이었고요. 어학은 잘합디다만. 한 번은 宋씨 말이, 남한에서 나오는 책에 주체사상을 자신이 소개하게 되어 있다면서 나한테 원고를 대신 써달라고 해서 써주었습니다. 내 원고를 가져가더니 고쳐서 다시 가져온 것을 보았습니다만 한국에서 어떻게 출판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宋斗律씨의 내재적 접근법이란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생각할 것도 없지요. 독재자를 독재자 입장에서 보자니 그게 무슨 이론이오』

―宋斗律씨를 북한에서 누가 담당했습니까.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임동욱이가 관리한 셈이오. 임동욱이는 對南관계를 실질적으로 조종하는 사람입니다. 남북고위급회담 때도 그가 서울에 내려와 延亨默이를 뒤에서 조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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