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씨(嚴氏) 家의 계명
‘爲善被禍吳所甘心’(선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하더라도 나는 이를 달게 받을 것이다.)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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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학교에 가면 엄씨는 나 혼자였다. 혼자서 다른 족속같이 불편하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잘난 사람들의 이름 중에 엄씨 성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국사책에서 조선 말 고종의 부인이 엄씨 성을 가진 상궁 출신이었다는 걸 봤다. 그 분은 여덟 살 때 궁녀로 차출되어 일하다가 민비의 눈에 들어 왕비를 모시는 상궁이 되었다. 그나마 고종이 눈길을 주기 시작하자 민비는 그녀를 궁 밖으로 쫓아냈다. 그 후 민비가 죽자 고종은 그녀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고종과 상궁인 엄씨 사이에 조선의 마지막 왕인 영친왕이 태어난다. 왕비가 된 그녀는 진명 여학교와 지금의 숙명여대를 설립했다. 본인의 의지보다는 운명에 순응한 여인이었다.
  
  그 다음으로 기억에 들어온 인물이 엄항섭이다. 지금의 고려대 전신인 보성법률학교를 다니던 그는 항일운동에 가담했다가 상해로 망명했다. 그는 프랑스 조계에 있는 관청에 취직해 거기서 받는 월급으로 임정 요인들의 끼니를 돕기도 했다. 당시 임정 요인들은 밥을 먹기도 힘든 실정이었다. 그는 글을 잘 썼나 보다. 김구 주석 명의로 발표된 각종 선언문이나 글은 거의 그의 손을 거쳤다고 한다. 그는 6.25 전쟁 때 납북되어 그곳에서 죽었다고 들었다. 세상에 나가 빛을 본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집 안에서 들은 얘기가 있다.
  
  중국의 당나라 현종 시절 중국인 악공(樂工)이 한반도로 건너와 영월에 정착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정착지가 영월이라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영월은 김삿갓의 가족이 역적누명을 쓰고 숨어 살던 오지였다. 중국의 동쪽 끝에 있는 나라 산중으로 조상은 왜 찾아왔을까. 당시 중국에 돌던 동쪽 끝에는 신선이 살고 죽지 않고 늙지 않는 약이 있다는 전설을 듣고 찾아왔을까. 마음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 본다.
  
  그 조상에게서 퍼진 엄씨족 속의 삶은 비참했던 것 같다. 조선시대 세조가 조카인 단종의 왕권을 빼앗고 오지인 영월의 초막에 감금했다. 당시 영월에 살던 엄흥도라는 사람이 혼자 있는 단종을 찾아가 위로해 주었다. 단종을 죽이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동시에 그 시신을 수습해 주거나 다른 도움을 주면 역적으로 삼족을 멸하겠다는 왕명이 덧붙여졌다. 전제왕권의 상징인 혈통을 완전히 끊으려는 조치였다. 버려진 단종의 시신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어느 날 밤 엄흥도가 아들 두 명과 몰래 단종의 시신을 가져가 그 조상들이 묻힌 선산에 묻어 주었다. 당시로서는 정면으로 왕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엄씨 일족을 처단하라는 왕명이 떨어졌다. 그때부터 전국의 엄씨 족은 모두 세상을 등지고 이백 년을 숨어 살게 된다. 엄흥도는 자식들과 함께 산 속으로 들어가면서 이런 글을 남겼다.
  
  ‘爲善被禍吳所甘心’(선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하더라도 나는 이를 달게 받을 것이다.)
  
  그 글을 보는 순간 나는 전율을 느꼈다. 성경 속 밭에서 진주를 발견한 사람의 마음 같다고 할까. 조상이 그 일을 한 동기는 이익이나 지위를 탐한 것은 아닌 게 분명했다. 깊은 산골 마을에 은거하는 이방인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당장 닥쳐올 목숨의 위협이 더 무서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해냈다. 그리고 그 후 이백 년 동안 엄씨족은 숨어 살다가 1669년경 송시열의 건의로 양지로 나온 것이다.
  
  변호사인 나는 작가를 겸해 오면서 한국의 명가(名家)를 연구한 적이 있다. 명가의 기준은 돈이나 지위가 아니었다. 어떤 정신을 가지고 주위에 모범이 되었나이다. 한국 최고의 명가는 경주 최부자 집과 고창의 김씨가 두 집안이었다.
  
  경주 최부자 집은 인근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고 했다. 그리고 높은 벼슬을 하지 말라는 게 그 집안의 가훈이었다. 고창의 김씨가는 퇴계의 친구로 장성에 필암서원을 세운 하서 김인후의 자손들이었다. 그 집안에서 조선말 갑부 김경중이 나왔다. 고창의 김씨가는 경주 최부자와 힘을 합쳐 동아일보의 설립 발기인이 되기도 했다. 고창 김씨가의 정신은 소동파의 삼양정신이었다. 고창의 김씨가는 아직도 재벌그룹인 삼양사와 고려대학 동아일보를 경영하면서 조용히 그 명맥을 유지해 가고 있다. 그 명가들을 부러워하면서 나는 엄씨가의 조상이 남긴 여덟 글자의 정신을 떠올린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듯 몸으로 진리를 실천한 조상이었다. 선한 일을 하고 은자(隱者)가 된 조상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사십년과는 비교되지 않게 이백 년을 바닥에 깔려 숨어 사는 고통으로 만들어낸 위대한 유산이다. 당나라에서 넘어온 악공 엄임의는 영월에 정착해서 은행나무를 심었다. 가문의 시조가 심은 그 나무가 천년이 넘는 세월을 버티면서 후손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 2019-10-30, 17:3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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