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한국 정부 대표를 엿먹이고 홀대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미친' 트럼프를 상대하는 것이지만, 우리 정부 대표가 지금처럼 대놓고 무시당하는 것은 아마 처음 보는 장면일 것이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미국까지 가서 루비오 국무장관 겸 국가안보보좌관을 만나지도 못 하고 돌아왔다는 설이 파다했다. 소위 ‘한미 고위급 면담 불발설'이다.

그러자 위성락 실장이 24일 서면 브리핑을 통해 루비오 보좌관 면담이 불발되었다는 일부 언론 보도를 부인하며 “루비오 보좌관뿐 아니라 베이커 국가안보부보좌관, 러트닉 상무장관, 그리어 USTR 대표, 후커 국무부 정무차관 등 다양한 인사들과 '협의'를 가졌다”고 말했다.

위 실장은 루비오를 만났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구체적인 동선까지 밝혔다. 그의 브리핑에 따르면, 7월 21일 오후 백악관 웨스트윙에서 약속된 시간에 방문했고, 베이커 부보좌관과 니담 국무장관 비서실장이 동석한 가운데 한미 현안에 대한 의견 교환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면담 직전' 트럼프 대통령의 긴급 호출로 루비오 보좌관이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위 실장이 백악관 웨스트윙에서 루비오 보좌관을 만나 악수는 했으나 협상에 들어가기 전에 루비오가 트럼프의 긴급 호출을 받고 그 자리를 떴다는 뜻이다. 사실상 면담이나 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한미 고위급 면담 불발설'이 맞는 것이다.

하지만 위 실장은 "루비오 보좌관 측으로부터 '7월 22일 미·필리핀 정상 행사 일정 등으로 인해 대면이 어려우니 유선 협의(전화 통화)를 원한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유선협의에서) 루비오 보좌관이 어제(21일) 대통령 호출로 직접 만나지 못한 점을 세 차례 사과했고, 협의한 내용을 대통령과 관계 장관에게 충실히 전달하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루비오 보좌관과의 면담이 미국 측 ‘거절’로 불발되었다는 일부 보도는 사실이 아니며, 이는 당사자의 명예뿐만 아니라 협상 국면의 한미 신뢰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위 실장은 면담 불발 뒤 루비오와의 '유선 협의(통화)'를 성과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통화라는 게 서울에서 하면 되지 굳이 미국에서 하면 달라지나. 통상 한미 정부에서 각각 같은 직책(국가안보실장· 국가안보보좌관)은 언제라도 통화가 되는 관계로 지금까지 알려져왔다. 그런데 루비오와 한번 통화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대단한 수확'인가.

위 실장의 워싱턴 방문 일정은 나흘이었다. 21일 백악관에서 루비오와 면담이 불발됐다면 다른 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도 '동맹국'인 한국과의 관세 협상 문제는 직접 만나서 풀어야 할 주요 의제다. 루비오가 위 실장의 체류 기간 중에는 도저히 짬이 안 나면 하루이틀 더 체류해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안 했을까. 트럼프 의중을 따르는 루비오가 이재명 대통령을 대신한 위 실장과 만나 협상하겠다는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위 실장이 서면브리핑에서 구구절절 밝힌 당일 상황 설명을 객관적으로 보면, 트럼프 정부가 어떤 의도를 갖고 위 실장 혹은 이재명 정부를 물 먹인 것으로 읽힌다.

미국 워싱턴까지 날아간 위 실장이 백악관 안에서 협상을 막 시작하려는 하필 그 시점에 트럼프가 왜 루비오 보좌관을 긴급 호출했을까. 루비오가 사전에 위 실장과의 협상을 트럼프에게 보고하지 않았을까.

트럼프가 위 실장의 면전에서 협상 파트너를 뽑아가버린 격이었다. 이는 사실상 한국 정부 대표를 엿먹이고 홀대한 것이나 다름없다. 위 실장도 그런 미국측의 노골적인 의도 표현에 모욕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위 실장이 "미국 측 ‘거절’로 불발되었다는 일부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루비오 측을 적극 변호하는 것은, 이재명 정부가 미국 트럼프 정부에 의해 거부됐다는 '이미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친중 성향'으로 의심받아 미국이 아예 상대를 안 해줘 따돌림당한다는 여론이 형성될 경우 그게 이재명 정부의 근간을 흔들지 모른다.

위 실장이 '빈손'으로 귀국한 날인 24일, 공교롭게 구윤철 경제부총리가 관세 협상을 위해 미국행 비행기를 타려고 인천공항에 나갔다가 미국측으로부터 협상 취소 통보를 받고 되돌아왔다. 비행기 출발 85분 전에 취소 '메일'이 날라온 것이다. 이건 아예 대놓고 외교적 무례를 연출한 것이다.

바로 다음날인 25일 미국 워싱턴D.C.에서 '한미 2+2 통상 협의'를 개최하기로 잡혔던 약속이 이런 식으로 무산된 것이다. 관세 협상 데드라인은 일주일 뒤인 8월1일이다.

미국의 예고대로 상호관세 25%가 부과된다면 한국 경제는 버티기 어렵다.수출 기업의 92%가 관세율 15%(일본이 협상에서 타결한 수치) 감당하기 불가능하다는 진단이 벌써 나온다.

일본은 이시바 총리가 지난 6월 트럼프와 정상회담을 가졌고 협상 대표 장관이 8차례나 방미해 협상을 벌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50일을 맞는데도 한미 정상의 첫 만남은 기약이 없다. 주한 미국대사는 계속 공석이다.